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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맞춤형 다중언어 생활’과 언어 교육

등록 2022-07-13 18:10수정 2022-07-14 02:35

경기도 안양시 옛 유유산업 자리에 조성된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사무동과 공장동, 보일러실과 굴뚝 등을 옛것 그대로 살려낸 복합문화공간이다. 옛 공장 사무동은 ‘김중업관’, 보일러실은 공연장과 세미나실이 있는 ‘어울마당’, 창고는 이곳 발굴 조사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한 ‘안양사지관’, 연구실은 교육과 특별 전시 공간인 ‘문화누리관’으로 꾸몄다. 마당 중앙에 공장의 일부였던 돌기둥 24개를 활용한 배영환의 작품 <사라져 가는 문자들의 정원>이 우뚝 서 있다. 연합뉴스
경기도 안양시 옛 유유산업 자리에 조성된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사무동과 공장동, 보일러실과 굴뚝 등을 옛것 그대로 살려낸 복합문화공간이다. 옛 공장 사무동은 ‘김중업관’, 보일러실은 공연장과 세미나실이 있는 ‘어울마당’, 창고는 이곳 발굴 조사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한 ‘안양사지관’, 연구실은 교육과 특별 전시 공간인 ‘문화누리관’으로 꾸몄다. 마당 중앙에 공장의 일부였던 돌기둥 24개를 활용한 배영환의 작품 <사라져 가는 문자들의 정원>이 우뚝 서 있다. 연합뉴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안양예술공원에 다녀왔다. 김중업건축박물관도 이곳을 찾은 이유 중 하나였다. 한국의 제1세대 건축가인 그의 공간에서 그의 인생과 건축세계에 관한 설명을 접하니 좋았지만 그가 남긴 텍스트 곳곳에 드러난, 한자, 일본어, 프랑스어 등을 섞어 쓴, 언어다양성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1922년에 태어난 김중업은 모어인 한국어를 집에서 배우고, 자라면서 일본어와 영어를 교육받았다. 1950년대 프랑스 방문 당시 프랑스어를 접했고 1970년대 미국과 프랑스에 머물며 영어와 프랑스어를 썼다.

김중업 외에도 이런 예는 많다.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을 받은 예술가들 대부분 다중언어 사용자였다. 1932년 태어난 백남준은 모어는 한국어지만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교육받았고, 영어를 배웠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을 졸업한 그는 서독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배운 독일어로 활동했다. 1964년 뉴욕으로 이사한 뒤 1977년 일본인 예술가 구보타 시게코와 결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에서는 주로 일본어를, 외부에서는 영어와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가 남긴 여러 작품에는 한글, 한자, 영어는 물론 일본어,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도 종종 등장한다.

문인들 가운데 다중언어 사용자는 더 많다. 이효석과 정지용은 일본어 교육 환경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일본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시인 김억은 어릴 때 서당에서는 한문을, 일본 유학 시절에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웠다. 그는 영시와 한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한국 단편소설을 에스페란토어로 번역해 일본 에스페란토협회지에 싣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다중언어를 사용한 문화예술인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이들 사이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모두 엘리트였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가운데 ‘고졸자’도 많지 않았고, ‘대졸자’는 극소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초엘리트’이자 ‘문화엘리트’였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이른바 문화엘리트들의 다중언어 사용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계 언어 교육 역사를 보면, 문화엘리트는 한문이나 라틴어 같은 전통 고전어 텍스트 중심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 한문을 익힌 일제강점기 문화엘리트들은 그렇게 보자면 전통적 언어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동시에 식민지라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엘리트로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지배국의 언어 교육에 적응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어, 일본어는 물론 나아가 영어와 한문, 프랑스어와 독일어 등 여러 언어를 쓸 줄 아는 다중언어 사용자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식민지 엘리트계급이 취한 전형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그 언어 사용자들과 소통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양한 창의적 감각이 형성됐다. 같은 상황을 하나의 언어로 사용할 때보다 여러 언어를 상황에 맞게 바꿔 쓰거나 섞어서 쓰는 ‘맞춤형 언어생활’을 통해 확보한 개성을 이들은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백남준, 정지용, 김기림 등이 남긴 작품 속에 드러나는 다양한 언어, 시인 이상의 작품 속 독특한 기호, 김억의 에스페란토어를 향한 관심은 그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반영된 ‘맞춤형 언어생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문화엘리트들의 ‘맞춤형 언어생활’은 언어 교육과 창의성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즉, 다양한 외국어 교육을 통해 창의성을 향상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를 위해 어떤 교육이 적합할까? 이를 위해 오늘날 한국의 언어 교육에서 필수로 이루어지는 국어와 영어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오늘날의 언어 교육은 여전히 개개인의 창의력이나 지적 발전에 중점을 두기보다 국가 발전이라는 거시적 목적에 더욱 충실하다. 국어도 그렇지만 영어 교육은 확실히 더 그렇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통해 영어 텍스트를 클릭 한번으로 번역할 수 있는 시대를 사는 오늘날, 이런 식의 언어 교육, 특히 영어 교육은 과연 적합한 걸까? 지금의 교육 방식이 아닌 언어를 통한 지적인 발전과 창의성을 향상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좀 더 다양한 외국어 교육 방향이 필요한 시대가 이미 시작된 건 아닐까? 안양예술공원에서 만난 김중업의 자취가 내게 던져준 질문들의 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경기도 안양시 김중업건축박물관의 내부 모습. 김수근과 쌍벽을 이룬 한국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1922~1988)은 서울 서대문구 주한프랑스대사관, 종로구 삼일빌딩, 한국방송(KBS) 국제방송센터, 세계 평화의 문 등을 설계했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사회적 발언을 이어가다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1970년대에는 외국을 전전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경기도 안양시 김중업건축박물관의 내부 모습. 김수근과 쌍벽을 이룬 한국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1922~1988)은 서울 서대문구 주한프랑스대사관, 종로구 삼일빌딩, 한국방송(KBS) 국제방송센터, 세계 평화의 문 등을 설계했다. 대쪽 같은 성격으로 사회적 발언을 이어가다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1970년대에는 외국을 전전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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