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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지켜준다

등록 2022-07-17 20:07수정 2022-07-18 02:37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제주에 다녀왔다. 놀러갔음 좋았겠지만 일하러 갔다. 늘 그렇듯 아침 비행기로 가서 저녁때 돌아오면 밤 10시께 집에 도착한다. 공항은 그야말로 줄서기가 장난 아니다. 시장통이다. 코로나가 다시 고개를 드는데 다들 어디론가 떠나는구나. 여행의 맛은 짐 꾸리기지. 커다란 바구니에 필요한 것들 툭툭 던져놓고 떠나기 전 뺄 것 빼고 간단명료하게 짐 싸는 게 중요하다. 나이 드니 비상약 챙기기가 필수. 머리부터 발끝까지(안경, 선글라스, 모자, 스카프, 얇은 반팔, 얇은 긴팔, 바람막이 잠바, 조끼, 지팡이, 기초화장품, 얇은 홑겹 색, 여행정보와 필기도구, 접이우산, 편한 슬리퍼, 휴대용 충전키트, 변압 플러그) 그림 그리며 작은 트렁크에 예술처럼 짐 꾸리기가 인생의 목표인 듯 그렇게 한다. 부칠 짐은 없었다. 구겨지지 않는 옷을 돌돌 말아 작은 보자기에 싸고(의상은 보자기에 싸는 게 최고) 화장품 몇 가지 화장가방에 챙겼다.

그날 리허설은 오후 1시 반, 공연은 3시. 새벽 5시 기상해 샤워 뒤 신새벽부터 발성연습 하고, 공연 순서대로 노래 연습과 동시에 머리세트말기-메이크업 기초 바르기-아침 차리기-챙겨 먹기-헤어+메이크업 마무리하고 비 올지 모르니까 비닐코팅 색에 챙겨 떠난 게 6시 반, 도착해서 제주공항 밖에 나오니 10시쯤? 마중 온 친구네서 잠시 쉬다가 이른 점심은 흑돼지구이로…. 난생처음 돼지껍데기를 먹었는데 씹는 맛이 재미있었다. 세상 쩐득쩐득함이 좋았고 된장찌개와 밥으로 마무리하니 함포고복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땀 흘리며 맛나게 먹은데다 후텁지근한 날씨 덕에 아침에 잘 다듬은 머리는 무너져 모양새가 엉망이 됐는데, 마침 미용팀이 대기 중이라 전문가의 간단 손질로 다시 멀쩡해졌다. 역시 머리 모양과 신발까지, 정수배기와 발끝을 잇는 선이 괜찮을 때 전체적인 단정함도 살아난다.

콘서트는 1, 2부로 나뉘어 있었다. 1부: 그럴 수 있어. 전문가 패널(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가족상담전문가)과 함께 접수된 사례를 놓고 이야기 나누며 공감하는 시간. 2부: 양희은의 힐링콘서트. 마음 토닥토닥/노래로 감성적 소통의 시간 갖기였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정신건강도 흔들려 불안, 우울, 자살충동, 가출 등 문제와 더불어 30%의 아이들이 우울하다 느끼며, 10% 정도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3~4% 아이는 자살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보고가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은 힘든 마음을 어찌 표현할지 모르고 도움 청하기도 주저하니, 혹 부모가 알게 돼도 심각성을 모르고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해 마음의 문제를 더 키우게 된단다. 정말 심각하고 괴로운 아이를 진지하게 이해해주면 그것이 큰 위로가 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경우도 많단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역시 나를 사랑하고 지켜준다. 힘들지만 도움을 청하면 다시 안전해질 수 있다. 중요한 건 다른 이의 기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어떤 상황에서건 내 편이 있다는 믿음이 아이가 하루하루 살아내는 큰 힘이라는 결론이었다. 사춘기와 갱년기의 대결 문제도 호르몬 때문에 몸과 마음에 급격한 변화로 부모 자식 간의 대화조차 힘든 상황이지만, 사춘기를 이기는 건 갱년기라는 데서 웃음이 터졌다. 한부모 가정과 부모 이혼 문제까지 이야기하고 밖으로 나오니 능소화가 흐드러졌다. 서울서도 보는데 제주 꽃송이는 크기도 크고 빛깔도 더 강해서 놀라웠다. 맑은 공기에선 꽃들도 걸지구나. 당일치기로 공연 다녀오면 집에 와서 푹 쉴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자리 바뀌면 잠도 못 잔다) 느긋한 식사를 못 누리는 게 유감이다.

먼 길 다녀와 피곤도 덜 풀린 이튿날 캐나다에 살고 있는 동생 양희경의 아들 부부가 애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모였다. 근 5년 만에 온 손주들인데 첫째는 우리말을 잊지 않고 잘하는데 둘째는 영어가 편하단다. 두 아이는 캐나다로 가기 전에 동생네서 살았는데, 우리 집과는 국이 식지 않을 정도도 아니고 국이 너무 뜨거워 좀 식혀 먹어야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우리 집 개들과 어린 날 추억이 많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제일로 보고 싶은 건 걔네 할머니(양희경)도 멍멍이 할머니(내 별명이다)도 아닌 우리 집 강아지 미미라고 해서 다들 놀랐다. 양희경의 며느리가 요리를 잘해서 외식을 안 하는데 모처럼 한국에 왔으니 먹고 싶었던 걸 외식으로 해결한단다. 짜장면, 닭볶음탕, 냉면, 만두, 돈가스, 치킨 등등. 아이들이 제일 먹고 싶은 게 산낙지여서 또 한번 놀랐는데 입안의 느낌이 재미있다는 게 이유였다. 내가 차려준 점심은 제주도 보말을 잔뜩 넣어 끓인 미역국에 나물과 총각김치, 임연수구이, 후식으로 차디찬 수박과 제주 팬이 선물한 소소당양갱이 인기였다. 저녁은 새우, 돼지고기, 호박, 당근, 양파 넣고 볶은 쌀국수였는데 처음 해본 건데 제대로 맛을 내서 온 식구가 죄 배불리 먹고 흡족해했다. 93살인 울 엄마도 모처럼 증손들과의 두끼 식사가 즐거우셨단다. 모처럼 많은 식구들 밥을 한 나는 허리도 아프고 좀 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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