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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세월호 참사와 대한조선학회의 당부

등록 2022-07-21 18:24수정 2022-07-22 02:37

실은 대한조선학회가 답답한 심정을 누르면서 사참위에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수의 전문가가 숙고해 내놓은 견해에 귀 기울여달라는 호소로 들리기도 한다. 그저 논문 한편을 통과시킬지 말지 판정하는 것보다 수백배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대한조선학회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물론 사참위도 그럴 것이다.
지난달 9일 서울 중구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서 문호승 위원장과 위원들이 가습기살균제와 세월호 조사 결과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9일 서울 중구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서 문호승 위원장과 위원들이 가습기살균제와 세월호 조사 결과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대한조선학회는 지난달 17일 이신형 회장 명의의 공식의견서를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 제출했다. 학회 산하 해양안전위원회(위원장 정준모)가 사참위 요청을 받아 사참위의 세월호 침몰 원인 조사보고서를 검토한 의견서다. 조선공학 세부분야를 망라한 전문가 3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대한조선학회 해양안전위는 대면과 비대면 회의를 수차례 열어 사참위의 세월호 관련 조사 결과를 검토했다. 4월18일에는 세월호가 거치된 목포신항을 방문해 선체 내·외부를 둘러보았다. 1차 검토를 마친 5월 하순에는 해양안전위 대표단이 직접 사참위 회의에 출석해 학회의 공식 검토의견을 발표하고 사참위원 및 조사관들과 토론했다.

조선학회가 세월호 침몰 원인 규명에 공식 자문한 것은 한국 공학계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사회적으로 주목받거나 논란이 있는 사안에 과학기술 전문가집단이 전문지식을 토대로 공식 의견을 내는 사례는 드물다. 특히 1952년 창립된 대한조선학회처럼 전문가 수백 수천명이 모여 있는 대형 학회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관해 의견을 모으고 이를 문서로 정리하여 제출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학회의 명예를 걸고 공적 발언을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아낸 전문가들의 견해가 사참위와 같은 정부위원회 입장과 배치될 경우에는 더욱 많은 내부 소통과 합의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학회는 자문을 요청한 쪽 입맛에 맞는 두루뭉술한 검토의견을 전달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내부 평가와 검증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사참위를 위해 조선학회는 외부 전문가 입장에서 사참위의 과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공식의견서를 보면, 사참위의 세월호 침몰 원인 조사, 특히 잠수함 등 수중체 추돌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사는 과학적, 공학적으로 부실했다. 실험의 가정과 설계, 데이터 분석, 결론 도출 등 거의 모든 단계에 문제가 있었다. 조선학회는 사참위가 세월호에 외력이 작용했다고 추정하는 방식에 대해 “비과학적이고 비공학적”이라고 평가했다.

조선학회의 의견서는 마치 학술논문 원고에 대한 냉정하고 단호한 심사평가서처럼 읽힌다. 사참위 조사 결과가 학술지에 논문으로 투고됐다면, 이는 동료평가를 통과하지 못해 ‘게재 불가’ 판정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석사 또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됐다면 저자는 학위를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들이 평소 논문에 쓰는 문체와 비교해 의견서를 읽어 보면, 실은 조선학회가 답답한 심정을 누르면서 사참위에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수의 전문가가 숙고해 내놓은 견해에 귀 기울여달라는 호소로 들리기도 한다. 그저 논문 한편을 통과시킬지 말지 판정하는 것보다 수백배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대한조선학회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물론 사참위도 그럴 것이다.

조선학회 공식의견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 그러면서도 가장 마음이 아픈 대목은 의견서 첫부분이다. 의견서 ‘총론’에서 “가설의 채택과 기각”에 관해 사참위에 이렇게 조언했다. 첫째, “한 개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원인이 100% 확실하게 기록되지 않았을 경우, 이를 규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가설이 존재할 수 있다.” 둘째, “과학적이고 공학적으로 추정 가능한 수준에서 가장 유력한 가설을 채택하고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열위의 가설을 기각 또는 배제해 나가는 과정에 근거해야 한다.”

이공계 대학 1학년 첫 수업에서 앞으로 과학자와 공학자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강조할 만한 얘기다. 많은 예산을 들여 오랜 시간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조사해 온 국가기관인 사참위에 대한조선학회가 과학 탐구의 기본 원칙을 당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

대한조선학회가 사참위에 제출한 공식의견서는 학회는 왜 존재하는지, 전문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관해 중요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한국의 조선공학 전문가로서 세월호에 품고 있던 무거운 마음들이 한층 무거운 공학적 언어로 의견서에 담겼다. 대한조선학회의 공학자들이 전달하려는 그 엄중함을 사참위가 9월10일까지 발간하도록 돼 있는 종합보고서 마무리 과정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학회와 전문가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 이 또한 세월호 참사가 남긴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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