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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납작한 법과 원칙

등록 2022-07-24 18:20수정 2022-07-25 02:37

7월2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룸에서 대우조선해양 사내협력사 노사 합의에 대한 정부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입장 발표에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참석했다. 행정안전부 제공
7월22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룸에서 대우조선해양 사내협력사 노사 합의에 대한 정부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입장 발표에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참석했다. 행정안전부 제공

[한겨레 프리즘] 이승준 이슈팀장

지난 22일 오후 4시20분께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와 하청업체들이 임금 4.5% 인상 등에 합의한 내용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안도감이 들었다. 애초 요구안에서 한참 물러선 합의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하청노동자들의 속상한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지만, 경찰력 투입에 따른 불상사는 피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태 초기에는 몇년간 삭감된 임금 30%를 회복해달라며 1㎥짜리 ‘철제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 가둔 하청노동자를 설마 강제로 끌어내겠냐고 생각했다. 게다가 현장은 추락 위험이 있는 복잡한 조선소 시설이다. 그러나 ‘설마’라는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은 “불법은 방치되거나 용인돼선 안 된다”며 “국민이나 정부나 다 많이 기다릴 만큼 기다리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말하며 공권력 투입을 시사했다. 이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후보자는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 방문했다. 이 장관은 기자들에게 “공권력 투입을 판단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 뒤 경찰 내부에서는 경찰력 투입 가능성을 끊임없이 언론에 흘렸다. 이는 협상장에 있는 하청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강제진압 시 노동자, 경찰 모두 다치는 대형사고가 날 것이라는 일선 경찰관들의 우려는 ‘법과 원칙’을 외치는 목소리에 묻혔다. 결국 진압 시나리오를 세우고 도상훈련을 하며 경찰력 투입 시기를 가늠한다는 소식까지 듣자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가슴 한구석이 탁 하고 막혀왔다. 언론사에 입사한 지 두달도 안 돼 목격한 용산참사, 오랜 시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을 취재했던 쌍용차 강제진압 등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당사자들의 고통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참혹한 현장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던 기자로서,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트라우마에서 아직 온전히 벗어날 수 없다.

합의 소식에 느낀 안도감은 3시간도 안 돼 싹 사라졌다. “정부는 이번 불법 점거 과정에서 발생한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것입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실에 나란히 서서 ‘법과 원칙’을 네차례 언급하는 모습에 가슴이 서늘했다. 비슷한 시간 1㎥ 철제구조물에서 나온 하청노동자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합의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법과 원칙에 따라 파업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경찰력 투입을 시사하며 사쪽 뒤에 서 있던 정부가 “법과 원칙에 기반하여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자평하는 대목에선 할 말을 잃었다.

세 장관이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이 사회갈등을 대하는 정부 ‘매뉴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상징으로 보이는 건 괜한 기우일까. 세 장관이 말하는 법과 원칙에는 숙련공도 저임금과 해고 불안에 시달리게 하는 다단계 하청 구조, 하청업체들의 임금 체불과 4대 보험료 체납 등 조선업계에 만연한 ‘불법’이 보이지 않는다. ‘구조적 불법’은 외면하고, 겉으로 드러난 불법에만 ‘엄정 대응’을 하는 ‘납작한 법과 원칙’만 강조되는 사회는 구성원들의 입을 막고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세 장관이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 이러한 것은 아니라고 애써 믿어본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에게 겨눈 법과 원칙이 곧바로 행안부 통제에 반발하는 경찰로 향하는 상황에 당혹감을 느낀다. 경찰청은 23일 열린 전국 경찰서장(총경) 회의를 주도한 류삼영 울산 중부경찰서장을 대기발령 조처하고, 현장 회의 참석자 50여명에 대한 감찰에 착수했다. 행안부가 경찰국 설치와 경찰청장 지휘에 관한 규칙 제정을 밀어붙이는 게 경찰 중립성을 강조한 경찰법 취지를 거스르고, 위법 소지가 있다는 의견은 학계·시민사회에서 꾸준히 나왔다. 휴일에 총경들이 모여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에 바로 ‘엄정 조치’를 예고한 것이다. 정부가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 ‘또 다른 타깃’을 찾았다.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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