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게스트>라는 수리천문서를 남긴 수학자 프톨레마이오스를 그린 16세기의 판화. 천문학, 물리학, 음악 등에도 정통했던 그는 로마가 지중해 일대와 유럽을 제패했던 기원후 2세기경 인물이지만, 별다른 근거 없이 그리스인 수학자로 알려져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민형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그의 책 <수학 입문>의 한 대목에서,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 2차 포에니전쟁 중 기원전 212년에 일어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로마 군인에게 그가 살해당한 사건은 세계 역사의 큰 변화를 상징한다. 추상적 과학을 사랑하는 이론가들이었던 그리스인 대신에 실용적인 로마인이 유럽 문화의 선두에 나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대목, 그리고 책 이곳저곳에서 19세기에 교육받은 영국 지식인답게 고대 역사에 관한 많은 오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여러 오류 중 일부만 수학자의 관점에서 잠깐 생각해보자. 화이트헤드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19세기 이후로 ‘어째서 고대 로마에 수학자가 없었나’ 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로마인의 실용적인 세계관’을 들먹이길 좋아했다. 때로는 그런 실용성에 대한 집착을 로마 문화의 전반적인 궁핍과 궁극적인 멸망에까지 결부시키려고 한다.(로마 문명은 아르키메데스 죽음 이후 아무리 좁게 해석해도 600년가량 지속했다.)
로마시대에도 우리가 보통 수학자, 혹은 수리과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물론 많았다. 문화, 과학, 기술 등이 시대에 따라 때로 전성기를 거치기도 하고 발전이 느릴 때도 있겠지만, 천년 넘게 지속한 로마 공화국과 제국에 수학자가 없었다는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선 ‘로마 수학자가 없었다’ 말을 ‘뛰어난 로마 수학자가 없었다’는 말로 너그럽게 해석하기로 하자. 하나의 가능성은 그런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로마 수학자를 일부러 평가절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보다 훨씬 간단하다. 로마 수학자가 없게끔 미리 ‘로마 수학자’의 의미를 정의해버렸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의 유명한 수학자 몇명을 꼽아보자. 후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 중 하나는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기원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 근방에 살면서 천문학, 물리학, 수학, 음악 등을 다방면으로 연구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은 나중에 <알마게스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수리천문학 책이다. 원제목이 <수학적 질서>라는 사실이 암시하듯이, 그는 이 책에서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문명의 수학적 지식과 관측 데이터를 집대성하면서 그 체계를 이용해 태양계 이론을 한번에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이 책을 통해서 고대 수학의 이론적 전개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하고, 우주를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는 천체물리학의 초기 버전을 읽을 수 있다. 이 이론은 저자가 죽은 뒤 약 천년 넘게 후대 과학자들에 의해 인용됐다.
그 외에도 기원후 알렉산드리아는 많은 수학자를 배출해서, 삼각형의 넓이 공식으로 유명한 헤론, 방정식의 정수해 이론을 창시한 디오판토스, 고대의 가장 유명한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 등이 그 근방에 살면서 활동했다. 그들의 정체성에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 중 하나는 유럽의 영향력 있는 고전학자들이 많은 로마시대 학자들을 ‘그리스인’이라고 분류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사례들의 경우, 그들이 그리스인이라는 주장은 별다른 근거를 찾기 어렵다. 그들의 인생에 관해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이 적고, 인종조차 알려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에 속했다. 이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륙 전쟁에서 유래된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중심지였지만, 위치는 예나 지금이나 이집트에 있다.(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 왕조’였는가도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그리스어로 쓴 글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그리스인 수학자라는 가장 유력한 근거다. 지중해 주변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그리스어가 학문의 언어로 통용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논문을 썼기 때문에 그리스인이라는 주장 자체는, 마치 내가 영어로 논문을 쓰기 때문에 영국인이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그렇게 따지면 현 세계 대부분 수학자는 영국 수학자이고 뉴턴은 라틴어로 논문을 썼기 때문에 로마 수학자다.
프톨레마이오스나 헤론이 그리스 수학자로 분류됐던 동기는 여기에서 간략하게 다루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이었다. 16세기 이후 점점 성행한 유럽의 ‘정체성 정치’가 초래한 문화적 풍토였다고 대략 이해할 수 있다. 학문적 활동의 지정학적인 함의를 완전히 피할 길은 물론 없다. 그러나 세계 문명을 진지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사람은 현재와 과거의 정치적 저의를 경계해야 함은 당연하다.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