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번존스, <마리아 잠바코>(Maria Zambaco)>, 1870, 캔버스에 유채, 76.3×55㎝, 클레멘스 젤스 미술관(Clemens-Sels-Museum), 노이스, 독일.
[크리틱]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사물의 표면만 볼 수 있는 인간의 눈과 달리 신은 사물의 앞과 뒤, 겉과 속, 그리고 이전과 이후까지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모든 것을 보는 신의 시선을 피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신 앞에서는 겸허한 자세가 된다. 디테일에까지 신의 눈이 있다는 것은, 숨은 구석까지 빈틈없이 완벽한 상태를 말하곤 하지만, 디테일 하나하나가 전체를 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평범해 보이는 작은 것 속에 앞으로 전개될 운명이, 이른바 계시처럼, 새겨져 있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디테일에도 신이 산다. 이 영화는 산에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나는 자연을 배경으로, 죽음과 사랑이 마치 별개인 듯 느슨하게 전개되다가 급속도로 접점을 향해 치닫는다. 형사와 피의자 관계로 만난 남녀 주인공 사이에 피어오르는 애정의 배후에 피살 사건들이 놓여 있다. 관객은 로맨스 이야기에 한발을 내디딘 채, 머리로는 어느새 사설탐정처럼 범인의 행방을 쫓게 된다.
이 영화를 두어차례 반복 관람했다는 이들이 주위에 제법 되던데, 볼 때마다 첫 관람에서 놓쳤던 디테일의 상징성을 새록새록 발굴해내는 묘미가 있다고 얘기한다. ‘마침내’라든가 ‘붕괴’와 같은 의미심장한 단어들, 정훈희가 부른 노래 ‘안개’와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 아다지에토, 인공눈물, 석류, 그리고 자라 등 치밀하게 선별된 소품과 섬세한 뉘앙스가 담긴 대사들은 전체 줄거리에 수겹의 암시를 덧대며 풍부한 상상을 유도한다.
나는 여주인공 탕웨이가 입고 나온 푸른색 원피스를 보면서, 19세기 영국의 에드워드 번존스가 그린 1870년 초상화 <마리아 잠바코>가 떠올랐다. 탕웨이의 드레스가 파란색 같기도 하고 초록색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묘사되는데, 그림 속에서 잠바코가 입은 드레스도 녹색인데 청색 빛이 살짝 감지된다. 과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청색과 녹색은 뚜렷한 구분 없이 푸른색이라고 애매하게 이해돼 왔다. 신호등의 녹색을 가리키며 ‘파란불’이라고 말하는 것도 오랜 혼돈의 흔적일지 모른다. 우리는 파랑과 초록에서 무한한 하늘이나 싱그러운 자연, 젊음, 희망과 같이 긍정적인 측면만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파랑은 우울의 색으로 읽히기도 하고, 초록은 때로 불운과 관련된다. 탕웨이와 잠바코의 드레스에도 모호하고 다중적인 푸른색의 상징성이 감돈다. 이별 뒤에도 갈망이 멈추지 않는 푸른 사랑이다.
화가 번존스와 조각가 잠바코는 예술가끼리 서로 잘 통한다는 친구의 선을 넘어서서, 남자와 여자로 서로 그리워하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아내가 있던 남자는 비장한 심정으로 잠바코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자살까지 시도할 만큼 상심이 컸던 여자는 마지막으로 자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애원했다. ‘헤어질 결심’으로 부탁한 그림이었지만, 어쩌면 잠바코는 그림이 영영 미완성으로 남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림의 완성은 두 사람이 더는 함께 있을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을 보면 기쁜 장면을 봤을 때보다 여운이 오래 남는다. 우울한 감정에는 예술적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인간 감정을 연구하는 수전 케인은 설명한다. 저서 <비터스위트>에서 그는 애처로운 마음을 미감으로 탈바꿈시키는 원동력은 갈망이라고 덧붙인다. 비터스위트(bittersweet)는 아프지만 아름답다고 느끼는, 고통이 동반된 미적 감동을 말한다. 갈망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슬픔으로 남게 되고, 계속해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슬픈 울림이 있는 작품의 디테일에는 예술가가 심어놓은 갈망의 요소가 분명 있다. 그것을 찾아낸 감상자가 즐기는 것이 바로 미학적 여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