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영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이 지난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새출발기금 추진방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제공
[편집국에서] 김진철 | 경제산업부장
윤석열 정부는 스스로를 ‘새롭다’고 규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새 정부 국정과제,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 새 정부 업무보고, 새 정부 에너지정책 방향 등 ‘새 정부’라는 표현을 곳곳에 사용한다. 새로운 것은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는 생생하고 산뜻한 것이다. 새로 집권한 정부인 건 틀림없지만 규제완화, 감세, 공공부문 개혁 등 내놓는 말마다 새롭기는커녕 기시감이 짙다. 많은 이들이 윤석열 정부를 ‘엠비(MB) 시즌2’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새’를 강조하는 속내는 문재인 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말끝마다 ‘전 정부’, ‘전 정권’이 달려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 다른 정권 때하고 한번 비교를 해보라, 전 정부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도덕성 면에서 전 정부에서 밀어붙인 인사들과 비교될 수 없다, 민주당 정부 때는 안 했나…. 윤석열 대통령 머릿속에는 문재인 정부가 유령처럼 떠도는 듯하다. “윤석열 정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와 1100조원에 육박하는 국가부채를 전 정부로부터 물려받았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에서는 일말의 억울함마저 읽힌다.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밑거름 삼아 앞날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뒤돌아보고 되짚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꾸 뒤를 돌아보기만 하다 보면 앞으로 갈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거나 아무런 생각이 없기에 과거로만 시선을 돌리는 경우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거듭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건 공포심 때문일 것이다. 쫓기듯 도망치듯 우왕좌왕하는 발걸음에 정처가 있을 리 없다.
‘안티 문재인 정부’ 정부로는 방향성을 가질 수 없다. 이른바 ‘반공’의 참혹한 폐해로부터 익히 배웠듯이 ‘무엇이 아니다’라는 것만으로 ‘무엇이다’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에 대한 반대’는 대개 쉽게 휘두를 수 있는 공격도구였을 뿐이다. 게다가 복잡다단한 변수로 가득한 입체적인 이 시대에 무엇에 대한 안티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고 불확실성 가득한 난국을 타개해가야 할 집권세력의 책임 있는 자세로도 보기 어렵다.
윤 대통령과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원칙과 상식’을 강조해왔다. 그 원칙과 상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넉달 동안 윤석열 정부의 행보에서 확인된 원칙은, 원칙 없음의 원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안과 무관치 않은 일로 재판을 받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특별복권해주고, 회삿돈으로 원정도박한 재벌 회장과 이미 경영활동을 하지 않는 전 회장까지 사면해주면 경제가 살아날까? 규제완화를 밀어붙이고 경제범죄 처벌을 완화하겠다면서 자유만 되뇌면 원칙이 지켜지는가?
윤 대통령과 정부 핵심들이 거듭 외쳐온 상식은 그들만을 위한 것일 뿐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 공유하는 가치관과 지식, 판단력이 본래의 상식이라면 그들의 상식은 몰상식에 불과하다.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주고 금융투자소득세를 사실상 백지화하면서 비정상을 정상화한다고 하는 데 환호하는 이들이 누구일지는 거론할 필요도 없다. 복지지출 증가는 극도로 억제하는 예산을 짜면서 ‘따뜻한 나라’를 표방하는 것이 상식이라면, 국어사전은 다시 써야 한다.
코로나19 방역조처에 협조하면서 큰 피해를 본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을 위한 새출발기금이 마련됐다. 이 정부가 우리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는 여전히 의문투성이이지만, 새출발기금만은 다행스럽다. 대선 전부터 준비돼온 정책으로, 그만큼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부족하기 그지없던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피해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정책에 ‘퍼주기’라고 비난해온 이들이 운전대를 잡은 터여서 더욱 그렇다. 새출발기금도 관형사 ‘새’가 붙어 있다. 생생하고 산뜻하지 않아도, 긴요한 정책은 많다. 원칙과 상식은 꼭 새롭지 않아도 된다. 아니 새롭지 않을 때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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