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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산시는 영어상용도시 추진 계획 재고해야

등록 2022-09-07 18:35수정 2022-09-08 02:09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등이 지난달 29일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 정책 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광수 기자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등이 지난달 29일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 정책 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광수 기자

[기고] 김주원 | 한글학회 회장

부산시가 영어상용화 도시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시와 부산교육청이 함께 추진하는 영어상용도시는 유치원생과 초·중·고생, 대학생과 시민이 영어를 배우고 실생활에서 활용할 기회를 더 늘리고, 외국인이 부산에 방문했을 때 관광이나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영어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부산시는 2030년 세계박람회 유치와 연관 지어 이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움직임을 접한 한글문화단체 회원과 부산의 여러 시민단체는 우려를 나타내며 부산시청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반대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이렇듯 여러 단체에서 영어상용도시 계획에 반대하는 이유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말글이 겪어온 시련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말하고 쓸 수도 없던 혹독한 시기가 있었음을 이미 잊었다는 말인가. 애국지사와 선열들이 우리말글의 미래를 위해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귀중한 생명까지 바치며 우리말글을 지켰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문제는 부산이 자그마한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제2의 도시, 인구 330여만명의 대도시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애써 지켜온 우리말글의 지위를 스스로 버리겠다는 이런 계획은, 지금까지 몇몇 지자체에서 학부모들의 영어 교육열에 편승해 영어마을을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크다. 따라서 대한민국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우리말글의 앞날에 끼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고 더욱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부산시와 교육청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수준 이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중 하나가 2030년까지 부산형 어린이복합문화공간인 ‘들락날락’ 500여개를 조성하는 것이다. 들락날락은 원어민과 자유롭게 책을 읽으며 놀 수 있는 놀이·독서공간이다. 즉 500여개의 영어마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졌던 영어마을 대부분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계획인지 알 수가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여 추진하는 영어 사용에 관련된 정책은 성인들 각자의 판단에 의하여 이를 따르든 따르지 않든 자유롭게 선택할 권한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데, 이러한 정책들을 교육청에서 시행한다면 학생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과거에 가능한 한 어릴 때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처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퍼지면서 원어민 강사를 대거 초빙해 영어교육에 몰두하던 때가 있었다. 그 방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시 열기가 요즈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방법이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공교롭게도 요즈음 청소년의 문해력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런 교육과 관련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모국어를 확실하게 익힌 뒤 외국어를 배워야 두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두 언어의 간섭 현상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몇년 전 캐나다 대학에서 한국인 학생 두명이 교환학생으로 와서 나의 강의를 들은 바 있었다. 한 학생은 중학교 때, 다른 학생은 고등학교 때에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두 학생은 한국어 구사 능력에서 꽤 큰 차이가 나서 놀랐다. 고등학생 때 유학을 떠난 학생은 또래 대학생처럼 언어 구사가 자유로웠지만, 중학생 시절 한국을 떠난 학생은 말을 이해하고 답하는 데 어려움이 커 보였다. 특히 구사하는 어휘가 부족해 조금 어려운 단어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모국어가 제대로 자리잡기 전에 외국어가 주입된 결과였다.

부산시에서 영어교육을 강화하여 영어상용도시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우리말글의 앞날을 생각해볼 때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언어 주권을 스스로 포기한 행위로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세계박람회 유치와 진행에 필요한 영어 관련 수요는 지금부터라도 전문인력을 키워내고, 시급한 일은 통번역가들에게 맡기면 된다. 세계박람회 개최를 위해 모든 시민이 영어를 배워야 할 이유도 없고, 주변의 여러 시설물이 영어 명칭으로 적혀 있는 영어 환경에 내몰릴 이유도 없다. 부산시와 교육청 당국자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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