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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누군가의 이별준비노트, 당신은?

등록 2022-09-18 18:55수정 2022-09-19 02:36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코로나19 확진으로 맥이 떨어져 지난달 원고 약속을 못 지켰는데, 오랫동안 뭔가 빠뜨린 듯 이상했고, 아무도 없는 길목에서 갈 곳 모르고 멈춰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마감으로 늘 마음이 종종걸음을 쳤는데 대체 이건 무슨 기분? 희한도 했다. 기운 차리려고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아쿠아반 중에 제일 연장자이신 분이 “명절에 손주들만 챙겨줄 게 아니라 나도 나를 챙겨주고 싶어. 집수리도 하고 운동할 때 필요한 여러가지를 개비해서 기분이 좋다니까.” 듣는 이들이 다 잘했다 손뼉 치며 편들어주었다. 자기만을 위한 그런 이벤트도 꼭 필요하다며 부럽단다.

또 어떤 이는 다른 형제들도 다 편안한데 왜 부모님은 큰딸인 내 집에만 오시는지? 오빠들도 다 잘 사는데, 남편이 처음부터 묵묵히 무던하게 잘해서 그런가? 여하튼 나물 대여섯가지하고 고기도 찜과 구이를 준비하면 뭐 상차림 끝이라고, 이런저런 명절 치른 뉘 집 큰딸의 얘기도 들었다.

어느 결에 저녁녘이면 풀벌레 소리가 잔잔하다. 조심스럽게… 지난여름의 매미처럼 맹렬하지 않게… 그 소리 따라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11호 태풍 힌남노로 큰 피해 입기 전 9월 첫주 서울 장충체육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 앞에서 8명 후배와 함께 공연을 했다. 그간 유튜브로 성시경과 노래해온 가수들의 공연인데 모처럼 설렘이 컸다. 하지만 무대 공포가 심한 나는 울렁증이 커서, 노래하는 건지 두려움과 맞서는 것인지…. 어떤 때는 기가 막혀 웃음만 나오는데 남들에겐 여유로워 보인다니,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주최 쪽에서는 지하에 큰 식당을 마련해 따뜻한 밥과 국 반찬, 그리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게 해줘서 고마웠다. 다들 이런 시간과 분위기가 너무 그리웠다고 말했다. 파란 조끼 입은 100여명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분위기도 좋았다. “예전 공연 스태프들은 먹을 시간이 어디 있냐? 일귀신이 뒷덜미 채서 끌고 가는데 준비에서부터 철수까지 너무 고된 일이고 늘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그들을 닌자라고 불렀어”라고 말하니, 후배들은 어느 나라 말인지 못 알아듣고 눈만 껌뻑인다. “그랬다고! 예전엔 그랬어, 이젠 다다 옛날이야기다.” 이 동네 노동환경이 확실히 나아졌으니까….

9월의 <여성시대> 라디오프로그램에선 지금을 소중히 여기고 인생 마무리를 위한 이별준비노트를 받았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서처럼 많이들 이승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하셨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에는 이리저리 해주면 좋겠다는 바람, 또 장례식장에 어떤 음악이 채워지길 바란다 같은 사연을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 20대 때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 자체가 멀었지만 첫아이 출산 때 스치듯 죽음을 만났고 늘 곁에 있는 죽음을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깨달았다. ①치울 사람에게 과한 일 주고 싶지 않으니 물건 많이 쟁여두지 않겠다. ②우리 부부 둘 다 화장해서 가족 나무 동산에 뿌려달라. ③양가 다 종가지만 제사는 안 지내도 되고 날짜 맞추기보다 편하게, 상에 이것저것 올리지 말고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간짜장·치킨·맥주, 내게는 빵·떡·음료 놓아주고 배달시키거나 사 와서 도란도란 얘기 나눌 것.

# 평생 일만 하고 살았다는 38살의 어떤 엄마는 이별 전 나 혼자만을 위한 여행을 해보고 싶고, 사랑하는 가족과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을 갖고, 가장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기쁜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 그걸 품에 안고 떠나고 싶단다. 아파도 병원 가는 것조차 눈치 보며 산 인생, 쌍둥이 독박육아 하면서도 눈치 본 게 후회되고, 조금만 더 용기 내서 밖으로 나가고 나의 목소리를 냈다면 마음의 병도 줄어들었을 거라는 얘기.

# 네 아빠는 가족묘로 간다는데 나는 그곳이 싫다. 네 외할머니 계신 선산에 뿌려다오. 울 엄마 살아생전 따뜻이 모셔보지 못해 그렇게라도 보듬어보고 싶다. 제사도 지내지 마라. 모바일 부고장에 절대 계좌번호 남기지 마라. 내가 뿌린 것 거둔다지만, 그건 그네들의 판단인 것! 먼저 손 내밀지 말아라.

# 혹시라도 애도하고 싶으면 내 마음이 잘 담긴 ‘나 떠난 후에라도’를 틀어주셔요. 화장해서 어릴 때 내가 놀던 가회동 1번지 느티나무 아래 묻어주셔요. 아무런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바람에 흔들리는 어린 느티나무 잎새처럼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 여러분의 사랑 덕에 제 주머니에 남은 재물은 저처럼 19살에 무섭고 두려운 세상에 혼자 첫발을 내딛는 보호종료 젊은이들을 위해 쓰이길 바랍니다. 인생에서 제가 겪은 따스한 햇살도 모진 비바람도 다 고마웠어요. 여러분 안녕!

많은 이별준비노트 중에서 몇가지 추려보았다. 마지막은 내 이별노트다. 당신의 이별노트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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