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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형의 여담] 여왕의 죽음과 기억의 가치

등록 2022-09-21 18:21수정 2022-09-22 02:37

지난 19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을 마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이 포차에 실려 버킹엄궁 인근 거리를 지나고 있다. 여왕의 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부터 버킹엄궁을 거쳐 하이드파크 인근 웰링턴 아치까지 천천히 이동하며 시민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런던/AP 연합뉴스
지난 19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을 마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이 포차에 실려 버킹엄궁 인근 거리를 지나고 있다. 여왕의 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부터 버킹엄궁을 거쳐 하이드파크 인근 웰링턴 아치까지 천천히 이동하며 시민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런던/AP 연합뉴스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15년 동안 살면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영국은 분명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도시, 학교, 동네, 심지어 마을 테니스클럽 운영에서까지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조직의 진로를 결정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대학교들도 학과장, 학장, 총장 등의 권한을 복잡한 규정으로 제한하고 각종 위원회가 중대한 선택을 중재한다. 나 같은 평범한 교수도 결정 절차에 부단히 참여해야 하기에 여러 면에서 귀찮기도 하다. 종합대학인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구성하는 개별 칼리지들은 ‘자체 통치’(self-governance) 원리가 꽤 철저하게 구현돼 있어 교육 과정, 부동산 투자, 미술품 구매, 심지어 정원 조경까지 전체 교수회의에서 논의된다. 2007년 미국에서 영국으로 옮겨오면서 이런 구조에 적지 않은 문화 충격을 받았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이런 민주국가에서 왕실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떤 원리에 근거해 영국은 눈에 띄는 군주제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가? 세계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살면서 지켜본 결과, 상징적인 군주라도 꽤 많은 결정에 알게 모르게 압력을 가하고 민주정부와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됐다. 또한 영국의 왕실은 매년 정부로부터 약 9천만파운드(1500억원)에 달하는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따라서 자국민으로서도 군주제의 정당성에 관해 질문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민주이념이 강한 영국 사회에 왕실에 대한 경외감이 상당 수준으로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교수들도 대화하면서 ‘여왕 폐하’ 같은 칭호를 가끔 사용하는가 하면, 학교 만찬 중에 ‘여왕을 위해 건배’ 같은 왕정사회의 관습이 여럿 남아 있다. 며칠 전 찰스 3세의 즉위를 비판하다가 체포당한 옥스퍼드 대학교수의 사례가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지난 19일 치러진 장례식 전까지 길게는 14시간을 기다려 웨스트민스터홀에 놓인 여왕의 주검을 바라보며 묵념한 군중의 수는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대부분 현대인에게 있어 세상의 가치는 경제적 원리 말고도 여러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삶의 동기는 수많은 영적 혹은 상징적 가치들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왕실의 가치는 종교나 예술, 학문 같은 보편적인 분야들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군주가 구현하는 의미가 대체로 ‘애국’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으로 그 나라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가치가 왕실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그런데도 세계 많은 사람이 영국 왕실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어느 정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통과 지속성이라는 가치 때문일 것이다. 약간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기억의 가치’라 할 수도 있겠다. 영국 왕실은 미래로 나아가는 현재의 틀이 긴 과정과 절차의 산물임을 상징한다. 유럽 사회에서 수백년, 혹은 수천년 된 역사유적은 일상의 한 부분이며, 전통의 건설적 재창조와 보전 또한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그런 면에서 영국 왕실은 다른 여러 문화유적이나 관광자원처럼 타국인에게도 관심, 때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유럽이나 남아시아보다 물질문명을 잘 보존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학자인 나는 추상적 구조의 보존을 목격하며 감동할 때가 많다. 가령 북악산 정상에 서서 한강까지 뻗어 있는 도시 중심과 북한산을 동시에 바라볼 때가 그렇다. 도시 전경의 구체적인 구성원은 변화해왔지만, 산과 시내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서울의 추상적 구조망은 지속해서 보존됐기 때문이다.

나는 올해 여름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항상 방문하는 고등과학원에서 학술활동을 이어가며, 가족과 친지를 만나고 노부모의 일상을 돌보는 시간을 보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 9일 밤엔 평화로운 서울 정릉천 산책로를 걷다가 한적한 찻길로 올라와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밤 10시라는 늦은 시각에도 동네 작은 음식점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가로등 밑에 상을 펴고 몇 사람이 음식과 술을 나누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6~7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달려와 아빠의 품으로 뛰어들고, 팔에 안긴 딸은 아빠의 귀에 뭔가 수군거렸다.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부녀는 여유롭게 밤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끈질긴 인간의 관계망 역시 관습 속에 엮여 있는 문화적 기억의 가치를 지속해서 표현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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