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했다. 사회가 주로 쓰는 매체에 따라 콘텐츠도 바뀐다. 신문은 텍스트 위주라면 유튜브는 비디오로 뉴스를 전한다. 텍스트와 비디오는 접하는 방식이 다르다. 글은 읽지만 동영상은 보고 듣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독서는 배웠으나 시청은 배우지 않았다. 전자는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독해 능력은 대학 입시나 취업을 위해 중요하다. 반면 후자는 수동적이라고 여겨서 따로 훈련하지 않는다. 요즘 어린이는 스마트폰을 통해 일찍이 비디오에 빠진다. 동영상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란다. 그러나 교육제도는 무엇이 효과적인 시청 방법인지 가르치지 않는다. 독해 능력만큼 시청 능력을 중시하지 않는다. 괜찮을까?
스마트폰은 이미 인류의 두뇌회로를 새로 감고 있다. 나는 스무살부터 쓰기 시작해서 십년이 넘었다. 그동안 사고방식이나 정신상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지 못한다. 사회구조가 어찌 변하고 있는지도 막연히 감지할 뿐이다. 요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와 공황장애가 흔하다. 스마트폰 세대는 콘텐츠의 범람 속에 살고 있다. 한가지에 오래 집중하기 힘들다. 손바닥 안에 온 세상의 정보가 있다. 홍수에 빠져 허우적대는 느낌이다. 숨이 막히고 어지럽지만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수 없다.
근대인은 독서를 했지만 현대인은 서핑을 한다. 근대문명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설계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순차적이고 직선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가 지배했다. 텍스트는 이성적이다. 우주에 대한 무한한 감각정보를 분석해 전부 시각데이터로 환원한다. 이성적인 것은 곧 시각적이고 언어적인 것이다.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말이 되는 것만 진실이고 말이 안 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구텐베르크 세계는 ‘합리적 인간’을 주체로 설정했다. 근대국가는 학교에서 문법과 독해를 가르쳤다.
지금 우리는 저커버그가 설계하는 인터넷에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텍스트보다 비디오가 득세한다. 시각이 전부가 아니다. 청각이 함께한다. 인쇄술 이후 문자에 빼앗겼던 구술문화의 헤게모니가 돌아온다. 춤과 음악을 말과 글처럼 쉽게 주고받는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소통하는 미디어다. 복합적 심상의 콘텐츠가 여기저기서
나의 뉴스피드로 쏟아져 들어온다. 뉴욕에서 하루를 보낸 친구의 브이로그 다음에 이태원에서 공연을 하는 친구의 포스터가 나온다. 그 사이에는 난데없이 영화 광고가 뜬다. 순차적이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성의 시대는 갔다. 산발적이고 직관적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의 시대다.
저커버그 세계는 ‘직관적 인간’이 주체가 될 것이다. 메타버스는 지금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공감각적인 미디어다. 21세기를 건전히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서핑을 연습해야 한다. 인터넷을 탐색하는 행위를 파도타기에 비유하는 이유가 있다. 바다에서 서핑을 하려면 일단 바람과 물의 흐름을 잘 살펴야 한다. 호흡을 고르고 중심을 잡다가 적절한 파도를 올라탄다. 일어서서 균형을 유지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직선은 없다. 파도에 따라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면서도 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매우 수용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파도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어우러진다.
웹서핑도 마찬가지다. 데이터의 스트리밍 속에서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클라우드에서 너무 많은 데이터가 내려왔다 싶으면 잠시 쉴 줄도 알아야 한다. 독서는 집중이라면 서핑은 균형이다. 나를 비롯한 엠제트(MZ)세대의 대다수는 지금 웹에서 서핑을 하기보다는 망망대해에 빠져 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핑을 배우자. 그래야 질식하지 않고 메타버스를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