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책임은 법적 책임과는 다르며 총체적인 성격을 띤다. (…)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되레 ‘법’을 무기 삼아 정치의 고유한 차원을 집요하게 지워나갔다. 이러한 ‘반정치의 법치’는 ‘무책임의 체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뤄 한국의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상민 행안부 장관,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 등이 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이태원 참사 속보를 지켜보면서 애꿎은 목숨과 기구한 운명이 안타까워 몇 시간을 멍하니 보냈다. 더욱 괴로웠던 건 10대 때 세월호 참사를 보며 트라우마가 남은 세대가 20대가 되어 다시 이런 사고를 겪게 된 점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학창 시절 역시 정상적으로 보내지 못한 세대다. 그 새벽 한없이 슬픔에 가까웠던 감정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입을 열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윤석열, 행정안전부 장관 이상민, 용산구청장 박희영이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이건 축제가 아니”라면서 “행사의 내용과 주최측이 없는, 그냥 핼러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구청장이 저렇게 말한 이유는 주최가 있는 축제의 경우 지방자치단체에 법적 관리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겐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다는 주장이다. 이보다 더 많은 논란과 공분을 일으킨 발언도 나왔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다. 그는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 만약 경찰 인력이 적소에 배치돼 원활한 군중 흐름을 유도했다면 사고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이날 대다수 경찰이 도심 집회에 차출돼 이태원파출소 인력만으로는 10만여 인파에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10여년 전부터 핼러윈 기간 이태원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린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예상 못 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뉴욕 타임스>도 “완벽하게 막을 수 있었다”(Absolutely Avoidable)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던 것이다. 더구나 사고 발생 네 시간 전부터 이미 현장에서 11건의 압사 위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이 장관 발언은 거짓일 뿐 아니라 용납할 수 없는 책임 회피다.
가장 문제적인 발언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가애도기간’ 선포다. 이는 세월호 참사 등 주요 재난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천안함 참사 당시 딱 한번 선포된 적이 있다. 이에 따라 공연과 행사가 줄줄이 취소돼 문화예술인들이 고통을 감내하게 됐다. 또 정치적 책임을 묻는 목소리에 ‘애도 기간엔 자중하라’는 압력이 가해지면서 “애도의 계엄령”이란 말이 소셜미디어에 퍼지기도 했다(표현의 정확한 출처는 찾지 못했다). 물론 지키지 않는다 해서 실제 계엄령처럼 처벌받진 않기에 과도한 비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윤석열 정권이 국가애도기간을 지렛대 삼아 시민에게 침묵을 강요하거나 스스로 침묵할 이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선포 이후 윤 대통령은 출근길 문답도 취소해버리는 등 사실상 공적 소통을 닫아 잠갔다. 권력자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선언된 애도, 이것이야말로 ‘애도 없는 국가의 애도’이자 전례 없이 폭력적인 사이비 애도다.
‘국가애도기간’은 윤석열 정권의 본질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무책임의 체계’다. 무책임의 체계는 알려졌듯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든 말로, 전쟁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는 일본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윤석열 정권은 출범 이후 지금까지 권한을 무한대로 누리려 들면서 일체의 책임은 거부해왔다. 정치적 책임을 물으면 늘 실정법 뒤에 숨어 ‘법적 책임이 없다’고 뻗대는 게 다반사였다.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검사, 율사가 통치하는 나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 책임은 법적 책임과는 다르며 총체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정치지도자의 사과와 책임지는 태도는 사회 통합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 행위이자 사회적 의례이기에 중요하다. 잘 훈련된 정치가들은 사과를 적시에, 적절한 방식으로 언어화한다. 재난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되레 ‘법’을 무기 삼아 정치의 고유한 차원을 집요하게 지워나갔다. 이러한 ‘반정치의 법치’는 ‘무책임의 체계’와 동전의 양면을 이뤄 한국의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한명의 주권자로서 선포한다. 애도 없는 국가의 애도, 침묵을 강요하는 사이비 애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국가애도기간은 이미 ‘시민공분기간’으로 전환됐다. 책임져야 할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