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회색늑대 무리에는 털이 검은 늑대가 섞여 있다. 수천년 전 늑대 무리에 합류한 검둥개에게서 전파된 검은 털 유전형을 지닌 늑대는 개홍역 바이러스에 저항력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엘크를 쫓고 있는 늑대 무리. 위키피디아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수개월 전부터 산책길에서 가끔 긴장할 때가 있다. 60살 전후의 여성이 시커먼 털로 덮인 커다란 개를 데리고 다니는데, 몸통이 굵고 험상궂게 생긴데다 입마개도 하지 않았다. 편견일 수 있지만 만일 개가 흥분해 날뛴다면 주인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지나칠 때는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힐끔힐끔 쳐다보며 피하는 눈치다.
얼마 전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한 논문을 읽다가 이 개 생각이 났다. 전염병 유행이 북미 회색늑대 털색 분포에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인데, 털색이 검은 늑대가 개홍역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개과와 족제비과의 동물이 개홍역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발열, 구토, 설사 등의 증상을 보이고 치명률이 50%에 이른다. 그런데 털색과 면역력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털색은 멜라닌 색소의 종류와 함량에 따라 결정된다. 검은색/고동색을 띠는 유멜라닌 색소가 많이 만들어지면 털이 검고 노란색/빨간색인 페오멜라닌이 만들어지면 회갈색 계열의 털이 된다. 그런데 유독 회색늑대의 검은색 털은 다른 포유류의 검은색 털과 유전적 배경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멜라닌 색소 합성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유전자 변이가 아니라 베타디펜신이라는 면역 관련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난 결과다. 그 산물인 베타디펜신 단백질 변이형은 활성이 높아 면역계를 강화할 뿐 아니라 원래 표적이 아닌 멜라닌 세포에까지 영향을 미쳐 유멜라닌을 많이 만들게 해 털색이 검게 된다. 북미 회색늑대의 분포 지역에 따른 개홍역 바이러스의 창궐 빈도와 털색의 비율을 분석한 결과 유행 빈도가 잦을수록 털이 검은 늑대 비율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논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회색늑대의 검은 털 변이 유전자는 개에게서 받았다는 것이다. 개의 조상인 회색늑대는 세계에 널리 분포하는 종인데(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경북 문경에서 한마리가 포획된 뒤 더는 보이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북미와 이탈리아에만 털이 검은 변이형이 존재한다. 이들은 수천년 전 늑대 무리에 유입된 검둥개에게서 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1만2천여년 전 빙하기로 해수면이 낮아져 아시아와 북미가 육지로 연결됐을 때 북미로 건너간 인류와 동행한 개들 가운데 검둥개가 있었을 것이다.
수천년이 지난 어느 날 이들의 후손 가운데 하나가 사람에게서 벗어나 늑대 무리로 들어가 검은 털 유전자를 퍼뜨렸다는 시나리오다. 늑대와 어울릴 정도면 개의 덩치가 꽤 컸을 것이다. 아마도 산책길에서 종종 마주치는 커다란 검둥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 살았던 늑대 가운데서도 검은 늑대가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