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경찰은 지난 11일 사고 현장 통제선을 제거했다.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김원철 | 디지털미디어부문장
슬픔도 뉴스입니다. 괴롭지만 사실입니다. <한겨레> 누리집 방문자 수는 올해 유달리 잦았던 재난 때마다 비죽비죽 솟았습니다. ‘이태원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트래픽은 평소의 두배를 웃돌았습니다. 어떤 뉴스가 많이 읽힐지 판단하고, 그런 기사를 돋보이게 배치하고, 바이럴하고…. 늘 하던 업무지만 문득문득 스스로가 괴물 같아 깊은 자괴감에 빠졌음을 고백합니다.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 언론의 본질인데, 드러내야 할 대상이 비극일 때 언론은 늘 곤혹스럽습니다. ‘보도’와 ‘전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지만, 가끔 그 경계가 종이 한장 정도로 얇아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보도의 본질인 ‘드러내기’와 관련해 특히 사진 영역에서는 오랜 논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2019년 6월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서 강을 건너다 엎드려 숨진 부녀가 촬영됩니다. 엘살바도르 출신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와 두살배기 딸 발레리아였습니다. 강을 건너 미국 텍사스주로 밀입국하려다 거센 물살에 휘말려 익사한 상태였습니다. ‘미국판 알란 쿠르디’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트럼프 정부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한겨레>는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했습니다. ①사진을 싣는다 ②모자이크 처리하지 않는다(아빠가 아이를 자신의 티셔츠 안에 감싸 안은, 사안의 본질에 해당하는 장면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③흑백 처리하고 크기를 줄인다(사진이 줄 충격을 덜어내기 위해서입니다) ④숨진 아이의 할머니가 들고 있는 가족사진을 더 크게 싣는다(사진의 맥락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비극을 기록한 사진은 늘 격렬한 논란의 중심에 섭니다. ‘희생자를 모독하고, 관음증을 부추기며, 자극에 지쳐 참상에 둔감하게 만드는 재난 포르노그래피’라는 비판이 대표적입니다. 미국 언론학자 수지 린필드는 저서 <무정한 빛―사진과 정치폭력>에서 이런 주장을 정면 비판합니다. “모든 고통의 이미지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것은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 일은 중단돼야 한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이런 사진을 거부하는 것은 희생자를 존중하는 행위인가? (중략) 사진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고 그는 묻습니다.
그러나 실제 언론 현장에서 망자의 사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문화권마다, 언론사마다, 개별 사건마다 달리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 서구 언론이 한국 언론보다 비극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적극적입니다. <뉴욕 타임스>는 이태원 참사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하면서 천에 덮인 채 나란히 누워 있는 주검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않고 실었습니다. 그들이 독자와 맺고 있는 신뢰의 수준, 독자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역할 등이 한국 언론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저 무신경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시민이 언론에 요구하는 역할 자체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라도 비극 현장을 사실상 직접 목격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수만명이 운집한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한 이태원 참사는 과거 어떤 재난보다 비극의 현장이 빠르게, 여과 없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파됐습니다. 참사 트라우마 증상이 일반인들에게로 확산할 가능성마저 제기됩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에 가감 없이 노출된 시민은 ‘우리는 알 만큼 안다. 정제된 정보를 달라’고 언론에 요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발생 17일이 지났습니다. 치료 중이던 한분이 돌아가시면서 13일 현재 사망자는 모두 158명으로 늘었습니다. 비극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조명하고 드러내어 문제를 직시하게 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언론에 있습니다. 한줄의 기사, 한장의 사진이 또 일어날지도 모를 다음 참사를 막는 데 깃털 같은 기여라도 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경계하겠습니다. 참사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온 마음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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