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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국가의 부재와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

등록 2022-11-15 18:09수정 2022-11-15 18:40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있는 전국 각지 학생들이 그린 타일벽화 중의 한 작품. 사진 권혁용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있는 전국 각지 학생들이 그린 타일벽화 중의 한 작품. 사진 권혁용

[기고] 권혁용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겸 정치연구소장

이태원 참사 사진을 1면에 실었던 미국 <뉴욕 타임스>는 “확실히 막을 수 있었다”(absolutely avoidable)고 보도했다. 여기서 참사를 막지 못한 주체는 정부, 즉 국가다.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는 전국 각지 학생들이 그린 타일벽화가 있는데, 그중 한 타일벽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라가 있었는데….”

이태원 참사와 국가의 부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과 맞물려 있다. 정치학자 낸시 버메오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집권자가 민주적 수단을 활용해 민주주의 가치와 규범, 작동원리를 점진적으로 잠식해 가는 현상을 민주주의 퇴행이라 불렀다. 그 특징적인 징후는 행정부 권력 증대와 야당 괴롭히기다. 행정부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견제하는 입법부와 사법부를 약화하고, 정치적 경쟁자인 야당을 부패집단 또는 악의 무리라는 프레임을 씌워 수사-기소라는 매뉴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윤석열 정부는 경찰, 검찰, 감사원 등 억압적 국가기구를 동원해 야당 괴롭히기에 여념이 없다. 트럼프도 집권 뒤 한해 동안 한 일은 오바마 행정부의 업적을 뒤집는 일이었다. 윤석열 정부가 현재까지 한 일도, 잊을 만하면 나오는 대통령 설화와 문재인 정부 비난·정책뒤집기 아닌가? 경찰, 검찰, 감사원 등 국가기구를 동원해 야당을 괴롭히면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등엔 공권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을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권력일 때도 있다.

윤석열 정부 집권당은 대통령 충성파로 지도부를 구성했고 유승민, 이준석 전 대표는 체계적으로 치밀하게, 그리고 ‘적법한 절차를 따라’ 각각 배제됐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이 다수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들의 입법 취지를 무력화하는 시행령 정치를 하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대표적이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우회하는 시행령 개정도 추진되고 있다. ‘시행령 정치’는 미국에서도 이뤄졌는데 정치학자 앤드루 리브스와 존 로가우스키는 유권자 다수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의회를 우회하는 방식은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국가권력은 선택적으로 행사되고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을 방기한다. 국가권력이 권력분립과 견제와 균형을 핵심으로 하는 입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무너지도록 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최애 단어인 ‘자유’는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다. 고교생이 그린 만평 ‘윤석열차’에 “엄중 경고”했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자유와 자유주의에 엄중히 경고한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책임성의 체제다. 입법부와 사법부의 견제에 행정부 권력이 책임을 지는 수평적 책임성이 그 하나이고, 시민과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는 수직적 책임성이 또다른 하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국회에 책임을 진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시민과 유권자에게 책임을 진다는 자세는 있는가?

정치학자 다니엘레 카라마니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두가지 위협으로 포퓰리즘과 전문기술 관료주의를 든 바 있다. 시민들의 신탁위임(트러스트)을 받은 전문기술 관료주의(expert technocracy)가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권력자에게만 성과를 보여주고 평가받을 뿐 시민의 요구와 민의에 반응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치학자 로버트 달이 언급했듯이, 정치적으로 동등한 시민의 요구에 정부가 지속해서 반응하는 체제다.

판사 출신 ‘법률 전문가’ 행정안전부 장관, 시행령 정치의 법리적 근거를 강변하는 검사 출신 ‘법률 전문가’ 법무부 장관, 대법원에서 보복기소라며 공권력 남용으로 지적받고도 권력 핵심에 발탁된 검찰 출신 ‘법률 전문가’ 대통령실 관계자, 정경관 유착의 아이콘 ‘경제 전문가’ 국무총리, 그리고 ‘부패수사 전문가’ 대통령을 보면, 전문기술 관료주의의 위협이 이 나라에서 현실화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참사에 대해, 희생자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공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전문기술 관료 출신들은 자신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 지금 이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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