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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커피: 아주 특별한 기호품

등록 2022-11-15 18:10수정 2022-11-15 18:48

니컬러스 레이 감독의 고전 서부영화 <쟈니 기타>의 주인공 쟈니는 말한다. “누구는 금과 은을 갈망하고, 누구는 소 떼로 가득한 드넓은 땅을 원하지. 유난히 술과 사랑에 약한 사람도 있지. 그런데 알아? 이 세상에서 정말 소중한 건 말이야, 한 모금의 담배와 한잔의 커피 아니겠어.”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10년쯤 전 일이다. 서울발 프랑크푸르트행 독일항공 루프트한자에 탔을 때였다. 승무원들이 기내식에 이어 식후 음료로 차와 커피를 서비스하고 있었다. 맨 뒷자리에 있던 내게 승무원들의 업무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네. 모두 커피, 커피, 커피를 원해. 차는 잔뜩 남고 커피는 모자랄 지경이야!” 독일 항공기지만 서울발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20여년 동안 커피 수요가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왔다. 다양한 브랜드의 커피전문점도 급증했다. 수요라는 측면뿐 아니라 문화적 상징성 차원에서도 차와 커피의 관계는 역전됐다. 내 학창 시절인 1960~70년대는 다방에서 커피를 주문했지만, 지금은 커피숍에서 차를 주문한다.

커피는 일종의 기호품이다. 사전에서 정의하듯이 영양이나 섭생과 관계없이 “독특한 향기나 맛이 있어 즐기고 좋아하는 물품”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 커피는 생필품이 돼가는 것 같다. 사실 커피가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파됐던 때도 기호품과 생필품의 경계는 모호해지거나 쉽게 무너지곤 했다.

커피의 유래에 대한 다수 견해에 따르면, 커피나무는 아프리카 동북부 에티오피아가 그 원산지이지만, 커피 원두를 볶아서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형태로 발전시킨 공은 아라비아반도 서남쪽 끝 예멘에 살던 무슬림들에게 있다(사실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지리상 이웃’이다). 커피의 어원도 에티오피아와 아랍 기원설이 있는데, 후자가 우세하다. 아랍어 ‘카와’는 원래 와인의 한 종류를 가리켰는데, 술을 마실 수 없었던 무슬림들이 그 대신 각성 효과가 있는 커피를 즐기게 되면서 그 기호음료의 명칭이 됐다고 한다. 카와는 이어서, 카베, 카페, 커피 등의 서구어로 변화했다. 조선 말기 커피를 들여왔을 때는 가배(珈琲)라는 한자음역어가 사용됐다.

예멘이 커피 문화의 발원지라는 사실은 오늘날도 커피의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모카커피’라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모카(Mocha)는 예멘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이름이다. 아랍 사람들이 마시던 커피는 모카에서 이슬람 전역과 유럽으로 전파됐는데, 특히 16~17세기 모카 항구는 커피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가 커피 교역로의 주요 거점이 됐다. 이 시기는 유럽이 동양에서 오렌지, 레몬 등 감귤류를 한창 수입하던 때이기도 하다.

커피 애호가이기도 했던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에서 이런 역사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묘사한다. 콘스탄티노플 근교에서 작은 농원을 가꾸며 사는 노인은 고된 여행에 지친 이방인을 환대하며, 오렌지, 레몬, 자신이 직접 만든 여러 종류의 셔벗(과즙에 물, 우유, 설탕 따위를 섞어 얼린 얼음과자)을 내놨다. 그리고 정성껏 커피를 대접했는데, 커피에는 별도의 설명이 붙었다. “다른 지역에서 나오는 나쁜 품질의 커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모카커피”라는.

한잔의 커피가 소중한 법이다. 이는 모든 기호품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것은 한순간, 한번, 한잔, 한 모금에 특별한 ‘존재적 의미’를 부여하며 즐기기 때문이다. 그것을 즐기는 순간에 다른 모든 것들은 존재 의미 영역 밖으로 퇴출당한다.

니컬러스 레이 감독의 고전 서부영화 <쟈니 기타>의 한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 ‘쟈니’는 물욕과 지배욕, 그리고 애증과 시기심으로 언제든 총을 뽑아 들 기세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느긋하게 말한다. “누구는 금과 은을 갈망하고, 누구는 소 떼로 가득한 드넓은 땅을 원하지. 유난히 술과 사랑에 약한 사람도 있지. 그런데 알아? 이 세상에서 정말 소중한 건 말이야, 한 모금의 담배와 한잔의 커피 아니겠어.”

이때 기호품은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아름답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호품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 기호품을 질의 깊이로 즐기지 않고, 양의 확장으로 즐길 때 생기는 문제다. 표현이 좀 섬뜩하지만 그건 중독이다. 중독의 스펙트럼은 넓다. 일상의 습관에서 병리적 중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가 있다.

자유롭게 즐기는 기호음료가 중독의 이면을 지니는 것은 각성 효과 때문이다. 커피는 각성 효과를 지닌 기호음료의 제왕이다. 커피 예찬자로서 <커피의 역사>를 쓴 하인리히 야코프는 커피를 “기적의 음료”라면서도, 그 기적의 이중적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야코프는 커피의 각성 효과는 많은 사람에게 극소수의 천재들에게나 가능했던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철학자 칸트도 기호품은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했다. 야코프는 더 나아갔다. “커피가 야기한 인간의 근육 및 뇌에 대한 자극과 그 변형은 역사의 외관을 바꿔버렸다”며 “분석적 사고는 현대사회가 개막된 이래 문명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커피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동시에 야코프는 커피 중독에 의한 희생도 논했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커피의 각성 효과를 창작에 적극 활용했고 카페인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발자크 자신도 이를 고백한 바 있다. “커피가 배 속에 들어간 순간, 전면적인 소동이 일어난다. 아이디어가 즉각 행군을 시작한다” 각성 효과로 창의적 에너지가 넘치면 발자크는 밤새 글을 썼다. “밤의 작업은 이 까만 물의 분출로 시작되고 끝이 난다. 전투가 까만 화약 가루로 개시되고 종료되는 것처럼.”

야코프는 발자크의 사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발자크에게 바쳐진 ‘그는 살았고 또한 3만잔의 커피를 통해 죽었노라’라는 냉정한 비문은 비록 장난으로 쓰이긴 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생각할 동기를 부여했다. 커피가 천천히 효과를 나타내는 독약이라는 의미를 표현한 것일까?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에너지의 막대한 소모가, 성취를 배가시키는 동시에 개인의 삶을 단축한다는 말 아닐까? 생명의 단축에 동반되는 성취의 풍요로움이 카페인으로 상징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발자크의 사례는 극단적이다. 그러나 모든 기호품은 일상의 보통 사람들에게도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마력을 잠재하고 있다. 중독의 생리학적 특성은 뇌는 즐겁지만 몸은 망가진다는 데에 있다. 뇌과학적으로는 ‘뇌의 어떤 영역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몸을 속이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독의 낌새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기호품이 필수품이 되는 정도를 보면 된다. 중독됐다는 것은 ‘자유롭게 즐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필요성의 명분으로 기호품에 나의 자유를 담보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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