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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일본이 김학순우표를 발행한다면

등록 2023-01-03 18:52수정 2023-01-03 19:21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사과는 일본계 미국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다시는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의지를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지속적인 언급은 또한 우리 안의 파시즘을 경계하고 예방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으로 참전한 일본계 미국인들을 기념해 발행된 미국 우표. 미국 우정청(USPS)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으로 참전한 일본계 미국인들을 기념해 발행된 미국 우표. 미국 우정청(USPS)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우표수집이 취미활동으로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안부를 전하는 방식이 편지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니 40년도 전의 일인가 보다. 새나 꽃, 물고기 같은 특정 종류 우표를 모으는 사람들도 있었고 외국 우표를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이들도 있었다. 중요한 기념일이나 역사적인 날을 기려 특별우표를 발행하면 우표에 진심인 수집가들은 줄을 서 사기도 했다. 소인이 찍힌 우표를 모으는 이들은 편지봉투에서 우표를 조심스레 떼내 보관하기도 했다.

이메일이 등장하고 각종 에스엔에스(SNS)가 주된 소통 방식으로 자리잡으면서 편지 쓸 일이 없어지고 우표 살 일은 더더욱 없어졌는데, 지난여름 하와이에서 아주 오랜만에 우표를 샀다. 미국 우정청(USPS)이 발행한,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동양 청년이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우표다. 사진 옆으로 GO FOR BROKE(전부를 걸고)라는 글자가 디자인돼 있었고 그 아래에는 JAPANESE AMERICAN(일본계 미국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GO FOR BROKE라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로 이뤄졌던 442연대의 구호가 아닌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서부에는 일본인 12만여명이 살고 있었다. 일본인의 최초 해외 이민지는 하와이였다. 메이지유신이 단행된 1868년 일본인 153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 간 게 해외 이민의 시초였다. 이듬해인 1869년에는 40명이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다. 해외로의 이주는 일본 안에서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일종의 돌파구였다.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에선 각종 명목으로 부과되는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생활고를 겪거나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후 하와이가 미국 영토로 편입(1897년)되자 하와이에 거주하던 1만2000명이 넘는 일본계 이민자들이 일시에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 건너가는 일도 생겼다. 하와이보다 임금 수준이 높은 곳으로 재이주한 것이다. 일본 이주민들은 통조림 공장, 목재 제재소, 철도 건설 현장, 농장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된다. 일본 이민자가 증가하자 중국인배척법에 이어 1924년 일본인들의 이주도 법적으로 금지되기에 이른다.

중국인들의 이주는 일본인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절, 1848년부터 1855년 사이에 많은 중국인이 미국으로 이주해 왔고 이들은 이후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한몫을 담당한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했지만 이들은 곧 미국 주류사회의 비난 대상이 된다. 미국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 수준을 아시아 이주노동자 탓으로 돌리고 노동조합에서도 중국인을 배제한다. 이는 중국인배척법 제정으로 이어지는데, 특정 민족의 노동자 집단 입국을 처음으로 금지한 법률이었다. 황색위험(yellow peril)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속에서 일본 노동자들 역시 자녀들이 공립학교에서 배제당하는 등 차별받고 이어 일본인들 이민도 법으로 금지된다.

진주만 공습은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기름을 부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폭격 두달 뒤인 1942년 2월19일,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한다. 아시아 이주민들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태동한 행정명령 9066호는 적성국 출신 이민자들을 강제로 격리수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였다. 대다수 미국인이 이 법안을 적극 지지 찬동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일본계 미국인들은 ‘잠재적 첩자’ 혹은 ‘잠재적 적군’이 됐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학교에서 교육받고 미국 직장을 다녔음에도, 무엇보다 미국 시민이었음에도 일본계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수용소로 보내졌다. 적국인 일본과 연합해 내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추측 혹은 의심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442연대도 만들어졌다. 이 부대는 대대장 등 백인 간부 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하와이 또는 미국 본토 일본인 2세로 구성됐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는 전부를 걸고(go for broke) 조국인 미국의 승리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자신들이 미국인이라고 생각했고 실제 미국인이었다. 그들은 미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그 442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된 우표 속 인물은 하와이 이민자 2세인 야마모토였다. 우표가 발행된 해 백악관은 행정명령 9066호에 대한 사과 성명을 냈다.

“79년 전 오늘 일본계 미국인 12만명을 부당하게 강제수용한 행정명령에 서명이 이뤄졌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뿌리 때문에 수년간 가족과 직장에서 떨어져 수용됐으며 연방정부의 이 행동은 부도덕하고 위헌적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시기 중 하나”라고 바이든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발언했다. “당시 정책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이민자 배척으로 이어졌고 미국은 자유와 정의라는 건국이념에 부응하지 못했다. 고통당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연방정부의 공식 사과를 재확인한다.”

재확인한다는 건 이전에도 이미 사과했음을 의미한다. 1988년 레이건 전 대통령은 “인종적 편견과 전시 상태의 집단 히스테리에 휘둘린 정치적 과오”였다고 공식 사과했고 오바마 전 대통령 역시 2015년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 중 하나로 두려움에 굴복해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가치를 배신했던 행위”라고 발표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한·일 두 나라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우리 아이들과 그 이후 세대들에게 사죄를 계속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사과는 일본계 미국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다시는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의지를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지속적인 언급은 또한 우리 안의 파시즘을 경계하고 예방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일본계 미국인 병사 우표를 발견하고 굳이 산 것은, 언젠가 일본이 김학순우표를 발행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 때문이다. 김학순우표는 우리 아이들과 그 이후 세대들이 공동의 기억을 공유하고 공동의 가치를 설계하고 함께 평화를 만들며 살아갈 징표가 될 것이다. 머지않은 날에 일본 우정국이 김학순우표를 발행하길 바라본다.

※김학순은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처음으로 실명으로 증언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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