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중후반 배우들이 40대부터 연기한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의 촬영 뒷이야기를 풀어놓은 <아이리시맨을 말하다>.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4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아무리 근사한 곳에 가도 얼굴이 나오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좋아하는 배우(청년도 아니고 중견이었는데!) 인터뷰를 마친 뒤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강력한 현타가 온 다음부터 묵언수행 아닌 ‘묵찍수행’에 들어갔다.
얼마 전 거절하기 난처해 실로 오랜만에 취재 장소에서 사진을 찍게 됐는데 사진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디서 오신 이모님’ 얼굴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자세가 팔십 평생 고된 농사일로 뼈가 삭은 영화 <칠곡가시나들> 속 할머니들과 너무나 똑같았다. 기운 없고 아픈 허리를 지탱하기 위해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어 어깨가 뒤로 빠지는 그 자세 말이다. 나 역시 삼십대 초반부터 지속적인 요통에 시달려왔지만 허리 통증은 농부부터 돌봄노동자, 기자, 컴퓨터 프로그래머까지 현대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주민증 같은 거 아니었나.
문득 제인 폰다가 생각났다. 노인 드라마 <그레이스와 프랭키>에서 그레이스 역의 팔십 넘은 제인 폰다가 여전히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 나이에도 여전히 날씬한 몸이나 팽팽했던 피부가 아니라 꼿꼿한 허리였다는 사실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떠오른 것이다. 팔순 넘은 나이에도 예쁜 은퇴 노인이 아니라 의욕 넘치는 사업가 이미지가 강했던 데는 그녀의 꼿꼿한 허리와 반듯한 자세가 한몫했다. 사십대였던 1982년 에어로빅 비디오를 내 전 세계에 운동 붐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니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꾸준한 운동이 그 비결이었을 터다.
신체의 코어라고 하는 허리, 척추의 변화는 대표적인 노화의 외적 지표이기도 하다. ‘꼬부랑 할머니’까지는 아니라도 중년이 되면 서서히 등이 굽기 시작하고 키가 줄어드는 게 자연스러운 신체현상이다. 2년 전부터 내 키의 중간 숫자가 바뀐 것도 이 탓이다. 허리로 지탱하는 신체 힘도 떨어진다. 마틴 스코시즈와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등 전설적 감독과 배우들이 수십년 만에 다시 뭉쳐 화제가 됐던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의 뒷이야기를 다룬 <아이리시맨을 말하다>에는 스코시즈의 재미있는 회고가 나온다. 70대 중후반 배우들이 40대를 연기해야 했던 작품의 최대 난점은 늙은 얼굴이 아니었다. 최첨단 영상기술로 얼굴은 젊은 시절로 되돌릴 수 있었는데 배우들이 의자에서 일어날 때 저도 모르게 끙 소리를 내며 애써 허리에 힘을 주며 일어나는 동작은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운동하자는 뻔한 연초 결심 이야기냐고? 네, 그렇습니다. 사실 연초를 맞이하면서 몹시 우울했다. 재작년 초 이 칼럼에서 오십이 되니 뭔가를 이루겠다는 결심을 안해도 돼 좋다고 썼는데, 반대급부처럼 올해는 심란함이 몰려왔다. 대단한 결심도 아니었건만 약속했던 것들은 거의 지키지 못했고, 회사 일도, 집안일도 아무런 결실 없이 형편없다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물론 이런 후회는 지루한 연예대상 시상식처럼 반복되는 것이긴 한데 올해는 유독 심하게 앓았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도전은커녕 주어진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기도 어려울 거 같다는 불안함과 조급증이 커진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정신분석부터 다양한 종류의 상담 경험을 하고 심리학 공부를 꾸준히 했던 친구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친구는 우연히 동네 헬스장에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상담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봤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보통 몸이 아플 때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심리적으로 안좋으면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더라구. 마음이 안좋을 때는 운동을 하면 복잡한 마음을 털어낼 수 있고 몸이 아플 때는 마음을 공부해야 내 몸이 힘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거든.”
그래서 나는 굽은 허리 바로 세우는 것을 올해의 목표로 정했다. 오십 넘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가 아니라 ‘중꺾허’가 아니겠는가. 곧은 허리는 우리 삶을 괴롭히는 백가지 고통 중 가장 강력한 것 하나를 줄여주는 건강의 지표이면서 동시에 심미적, 심리적 의미도 크다. 앞에서 제인 폰다에 관해 말했지만, 나이 들어 보이게 하는 요소 중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게 굽은 허리다. 또 쫙 펴진 어깨와 허리는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자신감을 준다. 적어도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니 쫙 핀 어깨 속에 내 안의 작은 마음을 숨기기도 좋지 않나.
마음 같은 건 좀 꺾여도 된다. 나이 들어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세상은 아집이나 꼰대짓이라고 한다. 괜한 ‘중꺾마’ 가슴에 새기지 말고 마음은 꺾고 허리는 세우는 새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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