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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키케로의 ‘의무론’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등록 2023-01-10 18:35수정 2023-01-11 02:36

[고명섭의 카이로스]
마키아벨리의 ‘군주’를 민주주의 시대의 오늘날 언어로 말하면 무엇이 될까?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 혹은 인민이 될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어법으로 말하면 국민이야말로 ‘현대의 군주’다.

원로원에서 연설하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는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간교함을 거부했지만, 마키아벨리는 키케로의 권고를 뒤집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원로원에서 연설하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키케로는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간교함을 거부했지만, 마키아벨리는 키케로의 권고를 뒤집는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1469~1527) 의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에게 ‘악의 교사’ 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책이다. 이 책의 거의 모든 지면이 사악한 정치술을 속삭이는 듯하지만, 그중에서도 ‘군주는 어디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라는 제목의 제18장은 ‘악덕을 가르치는 사람’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를 굳힌 결정적인 장이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여우와 사자’를 동시에 모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정을 알아차리려면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그중에서도 군주에게 더 필요한 것이 여우의 기만술이라고 말한다. “군주는 능숙하게 기만하는 자, 위장하는 자가 돼야 한다. 기만하는 자는 쉽게 속는 사람들을 항상 발견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이 말이 당대인의 도덕 감각에 얼마나 거슬렸는지 느끼려면, 로마시대 철학자·정치가 키케로 (기원전 106~43) 의 <의무론>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키케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키케로 열풍’ 을 부른 인문 정신의 표상이었고, <의무론>은 그 시대의 도덕 교과서 같은 책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키케로의 <의무론>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과 같다. 선을 요청하는 곳에서 악을 들이밀고 정직을 권고하는 곳에서 기만을 제안한다.

키케로가 <의무론>을 쓴 것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직후, 로마 공화정 말기의 혼란 속이었다. 이 혼란은 머잖아 키케로 자신의 삶도 앗아갔다. “사랑하는 내 아들 마르쿠스야!” 로 시작하는 <의무론> 은 아테네로 유학 가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스토아학파의 경건주의를 받드는 아버지가 부자유친의 애틋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 책의 제1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불의를 저지르는 데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폭력과 기만이 그것이다. 기만은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폭력과 기만은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지만, 기만이 더 큰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 남을 가장 많이 기만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선인이라도 되는 양 위장하는 자들의 불의가 가장 위험하다.”

인간은 사자의 폭력성을 멀리해야 하며 여우의 속임수는 더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 그 스토아주의자의 가르침이다. 정직함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용감하고 고매한 자, 선하고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지 털끝만큼이라도 남을 기만하는 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키케로는 바로 그런 도덕적 덕목을 실천한 사람으로 앞 시대 인물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를 거론한다.

레굴루스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맞붙은 제1차 포에니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집정관이 돼 카르타고 원정을 지휘했다.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했던 레굴루스는 기원전 255년 북아프리카에서 코끼리 100마리를 앞세운 카르타고 군대와 정면으로 맞붙었다가 군사를 잃고 장군·병사 500명과 함께 포로가 됐다. 그해 겨울 포로 레굴루스가 카르타고의 사절이 돼 로마를 찾았다. 로마 원로원을 설득해 두나라가 포로를 교환하고 강화조약을 맺게 하는 것이 레굴루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카르타고가 제시한 강화 조건은 로마가 점령한 시칠리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레굴루스는 로마로 떠나기 전 강화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카르타고로 돌아가겠다고 맹세한 터였다. 원로원 의원들 앞에 선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의 감시인이 지켜보는데도 카르타고 쪽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두나라가 강화를 맺어서는 안 되며 카르타고 포로를 돌려보내서도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대로 강화를 받아들이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은 시칠리아를 잃어버릴 뿐 아니라, 좁은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대한 카르타고와 마주 보며 계속 위협을 받아야 한다. 원로원은 레굴루스의 충언을 받아들여 카르타고의 강화 제의를 거부했다.

레굴루스의 그다음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로마에 남으면 편안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다. 돌아가면 목숨을 잃는다. 레굴루스에게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눈앞의 이익을 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고 키케로는 말한다. “레굴루스는 그때 자신이 가장 잔인한 적을 향해 가장 잔혹한 처벌을 받으러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르타고인들은 돌아온 레굴루스를 끔찍하게 고문한 뒤 바구니로 만든 둥근 통 속에 집어넣었다. 레굴루스는 코끼리들에게 축구공처럼 차이다가 밟혀 죽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의무론>의 조언을 정확히 반대로 뒤집는다.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불리할 때 그리고 약속을 맺은 이유가 소멸했을 때, 약속을 지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가 무턱대고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군주론> 18장 서두에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쓴다. “군주가 신의를 지키며 기만책을 쓰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칭송받을 만한 일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군주론>의 저자는 이어 말한다. 싸움에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법에 의지하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지하는 것’ 이다. “법에 의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힘에 의지하는 것은 짐승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군주는 짐승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을 모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짐승의 방법, 곧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간교함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탈리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군주론> 의 마지막 장은 ‘야만족의 지배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하기 위한 호소’ 라는 제목 아래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갈기갈기 찢기고 유린당하는” 조국 이탈리아의 구원을 열망하는 간절한 마음을 열어 보인다. 악을 속삭이며 사악한 웃음을 짓는 듯한 마키아벨리 내면에 조국의 비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마키아벨리가 있다. 죽기 두달 전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영혼보다 내 조국을 더 사랑한다.” 이탈리아가 소국으로 쪼개져 강대국의 압박과 침탈에 시달리던 때에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를 수렁에서 구해내려면 ‘짐승의 방법’ 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그런 심중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과 함께 쓴 <로마사 논고>에서 엿볼 수 있다. “자기 조국의 안전이 절대적으로 걸린 문제일 때, 수단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자비로운가 잔혹한가, 칭찬을 받을 만한가 치욕스러운가 하는 것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모든 양심의 가책을 제쳐 놓고, 조국의 생존과 조국의 자유를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설교하는 ‘국가이성’ 은 확실히 냉혹하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 를 민주주의 시대의 오늘날 언어로 말하면 무엇이 될까?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 혹은 인민이 될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어법으로 말하면 국민이야말로 ‘현대의 군주’ 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 을 군주의 이성이 아니라 국민의 이성으로 읽을 때 그 진의에 더 다가갈 수 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간교함이라는 수단에 호소할 수도 있는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주인공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문답으로 구성했다. 파우스트가 묻는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메피스토펠레스가 답한다. “항상 악을 원하지만 언제나 선을 창조하고야 마는 저 힘의 일부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한번 더 부연한다. “저는 태초에 전체였던 것의 일부, 빛을 낳은 어둠의 일부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악은 부정하고 파괴하는 어둠의 힘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지만 끝내 선을 창출하고야 만다고 말한다. 악이 선을 낳는 이 변증법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두운 힘의 지배는 영속하지 않는다. 어둠은 끝내 빛을 불러온다. 누가 불러오는가? 국민이 불러온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어둠을 거부하고 어둠에 항거함으로써 빛을 불러들인다. 국민이 선악의 변증법을 실행하는 역사의 주체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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