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의 카이로스]
데리다는 텍스트를 그 내적 구조에서 살펴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 해체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푸코는 텍스트 너머의 더 넓은 맥락에서 텍스트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곧 텍스트를 둘러싼 외부의 권력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생각을 모두 살리는 방식의 읽기도 있을 것이다.
“나는 교사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책으로 익히는 학문을 완전히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 자신에게서 혹은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에서 발견될 학문만을 찾기로 결심하고 내 청년 시절의 나머지를 여행하면서 보냈다.”
서양 근대철학의 문을 연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자신을 세상에 처음 알린 책 <방법서설>의 서두에서 하는 고백이다. 스무살에 대학을 졸업한 데카르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으로 들어가 진리를 찾겠다고 결심했다. 데카르트가 들어간 그 ‘세상-책’ 속에서는 유럽을 참화로 밀어넣을 ‘30년 전쟁’(1618~1648)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청년 데카르트는 처음에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 군대에 장교로 들어갔다가 1619년 바이에른공이 이끄는 가톨릭 군대로 옮겼다.
기상관측이 주 임무였기에 이 젊은 장교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후위에서 사색하는 일이 많았다. 그해 1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참관하고 돌아오는 길에 데카르트는 도나우 강변 노이베르크 야영지에 묵었다. “그곳에서는 나를 어지럽힐 만한 사람과 만나는 일도 없었고, 걱정거리나 정념으로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온종일 홀로 난로가 있는 방에 틀어박혀 마음껏 사색에 빠졌다.”
데카르트는 이날 집요한 사색 끝에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발견했다고 믿었고, 뒷날 그 발견을 <방법서설>(1637)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저자의 기대와 달리 책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독자는 거의 없었다. 실망한 데카르트는 4년 뒤 <방법서설>의 핵심을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해 라틴어로 출간했다. 그것이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이다. <성찰>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는데, 그 의심의 과정에서 데카르트는 ‘감각이 일으키는 착오’를 거론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한다.
“그러나 똑같이 감각으로부터 얻은 것들이면서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지금 나는 여기 있다, 난롯가에 앉아 있다, 겨울 외투를 입고 있다, 이 종이를 손으로 쥐고 있다’ 따위가 그러하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바로 이 손과 이 몸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나는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미치광이들과 같이 취급하는 꼴이 될 것이다.” 데카르트는 말을 잇는다. “미치광이는 검은 담즙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뇌가 교란된 탓에, 자기가 알거지이면서도 제왕이라는 둥, 벌거벗었으면서도 비단옷을 입었다는 둥, 자기 머리가 진흙으로 빚은 항아리라는 둥, 몸뚱이가 통째로 호박이라거나 유리를 불어서 만든 것이라는 둥 우겨댄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만일 내가 이 몇가지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흉내낸다면 이 사람들 못지않게 미치광이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런 의심의 과정을 거쳐 데카르트는 진리의 ‘아르키메데스 점’, 세상 모든 진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받침대를 찾아냈다고 자부했다.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의심하는 나’ 곧 ‘생각하는 나’이며, 그 ‘생각하는 나’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발견한 진리의 원점이었다. 그 발견을 데카르트는 이렇게 정식화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정식을 통해 서양 근대 주체철학의 문이 열렸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의심을 검토하는 과정이 의심의 여지 없이 명료하다고 생각했지만, 훗날 <성찰>은 커다란 논란에 휘말렸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논란의 불을 지핀 사람 가운데 한명이었다. 푸코는 박사학위 논문 <광기의 역사>(1961)에서 데카르트가 말한 ‘미치광이 사례’를 끌어들여 자기 주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 영민한 철학자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광기와 이성이 영원히 단절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데카르트 이전만 해도 이성과 광기는 명료하게 나뉘지 않았고 광기를 이성의 적으로 상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나’와 함께 광기는 이성과 섞일 수 없는 것,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주체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됐다. “광기는 데카르트의 회의를 통해, 의심하는 자의 이름으로 추방당한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광기와 이성을 갈라놓은 것과 때를 맞춰 17세기 프랑스 사회에서도 광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의 대감금이 시작됐다고 푸코는 말한다.
<광기의 역사>는 이성이 광기를 추방하고 감금하고 탄압하는 근대 역사를 추적한다. 푸코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공통의 언어가 없다. 18세기 말에 광기를 정신병으로 규정한 이래 미친 사람과의 대화는 단절되고, 정상인과의 분리는 기정사실화했으며, 전에 광기와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대화는 (…) 완전히 망각 속에 묻혔다. 정신과 의사의 언어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일 뿐이며, 그런 침묵 위에 진정한 언어는 형성될 수 없다.” 이어 푸코는 그 책과 함께 널리 알려진 문장을 쓴다. “나는 이 (이성적) 언어의 역사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이 침묵의 고고학을 쓰려는 것이다.” 침묵 속에 갇힌 광기가 쏟아내는 말들의 역사를 쓰겠다는 선언이다.
이 장대한 책은 곧바로 도전의 대상이 됐다. 푸코의 책에 담긴 데카르트 해석에 반기를 든 이는 후배 자크 데리다였다. 데리다는 1963년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푸코의 해석을 정면으로 치받는 새로운 데카르트 해석을 내놓았다. 뒤에 이 강연문은 데리다의 첫 저작들 가운데 하나인 <글쓰기와 차이>(1967)에 실렸다. 데리다는 이 글에서 먼저 ‘침묵의 고고학’이 불가능함을 지적했다. 모든 학문은 논증하는 학문 곧 논리학이며 논리학이야말로 이성의 학문인데, ‘침묵의 고고학’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이다. 광기가 이성의 언어로 자기를 설명하는 것이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푸코의 해석이 지닌 더 본질적인 문제도 거론했다. 푸코는 데카르트의 ‘미치광이 얘기’에서 광기의 배제와 추방을 목격했지만, 데카르트의 글을 면밀히 읽어보면 그런 단정적 결론에 이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광기는 데카르트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감각적 착오의 특정한 사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광기만 따로 떼 이성 바깥으로 내몬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텍스트에서 광기와 이성 사이에 근원적인 단절이 일어났다는 푸코의 주장도 성립할 수 없다.
푸코에 대한 반격은 텍스트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데리다식 ‘해체주의 독법’의 분명한 사례가 됐다. 푸코의 반응은 뒤늦게 나왔다. 데리다가 푸코를 비판하고 9년이 지난 뒤 <광기의 역사> 새 판을 내면서 푸코는 데리다의 비판을 논박하는 글 부록으로 실었다. 논박의 핵심은 데리다가 텍스트를 둘러싼 역사적 콘텍스트를 보지 못한다는 주장에 있다. “담론적 실천을 텍스트의 흔적으로 축소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생략하며, 주체가 담론에 연루되는 방식을 분석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문제다. 데리다가 텍스트에 갇혀 그 텍스트만 헤집는다는 것이다.
쟁점은 뚜렷하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그 내적 구조에서 살펴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 해체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푸코는 텍스트 너머의 더 넓은 맥락에서 텍스트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곧 텍스트를 둘러싼 외부의 권력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생각을 모두 살리는 방식의 읽기도 있을 것이다. 텍스트를 그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읽음과 동시에,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 속에서 텍스트 읽기를 병행해 나가는 것이다.
데리다와 푸코는 비판적 독법의 두 면을 각각 보여준다. 이런 독법은 학술 담론을 넘어 권력 담론을 읽어낼 때도 유효하다. 권력장을 지배하는 담론이야말로 비판적 독법의 살아 있는 대상이다. 국가 권력의 모든 텍스트는 해체적으로 읽어야 할 대상이다. 동시에 그 담론을 만들어내는 국가 권력 자체의 콘텍스트를 보아야 한다. 권력이 담론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그 담론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까지 보았을 때 텍스트 비판은 본령에 이른다. 국가를 지배하는 권력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내는 비판의 눈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등대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michael@hani.co.kr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을 가르치는 르네 데카르트(오른쪽 둘째). 데카르트는 말년에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청을 받아 스웨덴으로 가 여왕의 개인교사가 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