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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중년의 여행에 파라다이스는 없다

등록 2023-02-01 18:47수정 2023-03-01 17:52

<트립 투 잉글랜드>는 두 중년 남자의 여행을 통해 여행의 일탈 속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나이, 죽음에 대한 성찰을 흥미롭게 펼친다.
<트립 투 잉글랜드>는 두 중년 남자의 여행을 통해 여행의 일탈 속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과 나이, 죽음에 대한 성찰을 흥미롭게 펼친다.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휴가지에서 이 칼럼 마감을 하고 있다. 바닷가 작은 방에서 원고를 쓰는 모습이라니 쿠바의 어촌 마을 코히마르에서 <노인과 바다>를 쓰는 헤밍웨이나 그리스 미코노스의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먼 북소리>를 집필하는 하루키가 떠오르지 않는가.

물론 그럴 리 없다. 부부 각자의 20년 근속 휴가에 맞춰 직장생활에서 최장기 휴가를 왔지만 고작 2주도 안되는 기간에 작가 흉내를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미리미리’라거나 ‘부지런’이라는 단어를 멀리하고 살아온 대가를 치를 뿐이다. 나 자신에게 쌍욕을 하며 싸들고 온 일은 이 칼럼뿐이 아니다. 현실의 스트레스를 캐리어에 싸들고 오는 여행이라니, 마이클 윈터바텀이 연출한 영화 <트립 투~> 시리즈가 생각난다.

나름 잘나가지만 한끗 처량함을 숨길 수 없는 두 중년 남자의 여정을 그린 이 영화들을 너무 좋아했나. 내가 시리즈 5편을 찍고 있는 기분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렇다. 환승편까지 열몇시간 비행기를 타고 내린 공항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사를 내뱉자마자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새까매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다. 휴대폰 날씨앱에서는 홍수 경고 문자가 뜬다. 도착 사흘째, 여행 간다고 자랑했던 단체톡방에서 연락이 왔다. ‘따뜻한 남쪽나라 사진 좀 보내봐.’ 나는 답장했다. ‘사진 보면 더 추워질까봐 못보내겠어.’ 먹색구름 가득해 보기만 해도 심난해지는 사진들이 휴대전화에 쌓여간다. 내 평생 처음 무려 6개월 전에 비행기 예약을 한 뒤 틈만 나면 뒤져봤던 이 지역 여행 블로그와 동영상에서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하늘 색깔이다.

물가 비싼 휴양지이기에 비용을 절약하며 수영장 바비큐도 하기 위해 일정의 전반부를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에서 머물기로 했다. 수십개의 좋은 댓글을 보고 예약했는데, 출발 직전 안좋은 댓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된다. 사진 속 모든 가구가 제 자리에 있음에도 사진과 방은 흰 구름과 먹색 구름 아래 풍경만큼이나 달랐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베란다에 앉아 비내리는 수영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남편이 말했다. “하와이가 아니라 부곡하와이에 온 거 같애.” 첫날 밤부터 밀린 일 처리하느라 밤새는 와중에 바퀴벌레 출몰로 사투를 벌인 건 예측불허 여행의 즐거움으로 언젠가 추억할 수 있으려나.

허름한 내 여행을 <트립 투~>에 비유하다니 톱스타까진 아니라도 영국에서 저명인사인 두 주인공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기분 나빠할 거 같다. 영화에서 그들은 영국 유력지 <옵저버>의 지원으로 고급 호텔과 고급 음식을 즐기며 영국 북부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까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지역을 여행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사십대에서 오십대로 넘어가며 10년간 이어진 이 시리즈의 관심사는 고급 호텔과 음식이 아니다. 모양도 예술작품인 음식을 앞에 두고, 두사람은 “맛있네” 한마디 던지고 유명배우 성대모사 따위나 경쟁한다. 각종 고전 문학과 인문학적 지식을 시끄러울 정도로 과시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아름다운 풍경과 근사한 음식, 두 남자의 잘난 척 아래 도도히 흐르는 중년의 불안과 여행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들이다. 스티브 쿠건은 언제 어디서든 유치할 정도로 친구 롭 브라이든보다 자신이 한수 위라는 걸 인정받으려 하지만 나이 들어가며 영화계에서 외면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짓눌려있다. 또 엇나가는 아들, 병든 아버지 등 사생활의 지뢰밭은 여행길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상대적으로 평균적인 삶보다는 많은 걸 누리는 인생이지만 오십 가까운 나이에 날씬한 배를 드러내고 바다에서 멋지게 수영을 해봤자, 주변 젊은 여성들에겐 ‘투명인간’이고 “마흔 전의 우울함은 멋있게 보이지만 마흔 넘어 그러면 그저 괴팍한 노인네로 보일 뿐”이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됐다. 중년의 여행은 10%의 해방과 90%의 일상이라는 걸 보여주는 이 시리즈를 예습하지 않았다면 이번 내 여행은 더 심난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오후 일정을 마무리하고 점심 겸 저녁을 먹으러 간 바닷가 야외 식당으로 잠깐 햇빛이 들어왔다. 기타를 치며 에릭 클랩튼을 노래하는 청년 앞에서 빨간 알로하 셔츠를 입은 백발의 자그마한 할아버지와 원피스를 세트로 맞춰 입은 통통한 할머니가 손을 잡고 천천히 춤을 췄다. 그들 뒤로 일렁이는 파도가 반짝반짝 빛났고 빈속에 들이부은 맥주 기운으로 알딸딸해진 나는 ‘이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의 해방감이 몰려왔다. 지금도 날씨앱에 이어지는 먹구름 가운데서 활짝 웃으며 사진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기쁨이 마음에 깔린 먹구름 사이로 삐쳐나왔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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