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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등록 2023-02-12 18:30수정 2023-02-13 02:34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어머, 이게 웬일이니? 왜 이렇게 근거 없이 몸과 마음이 가볍니? 이상하다! 하고 보니 입춘! 절기란 게 희한해서(물론 중국 기준이라 우리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입춘에서 곡우, 입하에서 대서, 입추에서 추수 마무리인 상강, 입동에서 대한까지…. 농어촌뿐만 아니라, 삭막한 회색의 도시에 사는 도무지 무덤덤한 내 몸과 마음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네…. 고맙고 또 반갑다.

바로 그날 전유성 선배의 글 “문 앞에 봄 왔다, 집 나가자.” 진즉에 이미 집 나가서 베트남에 다녀왔단다. 동생 희경이는 아들 둘과 세 식구가 모처럼(무대, 연기 쪽 일을 하니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거제, 통영, 나주까지 2박3일 봄맞이 여행을 다녀왔단다. 일단 거제 외포항의 대구촌에서 대구 코스(대구회+대구전+대구 맑은탕)를 시작으로 통영 서호시장 안의 쫄복국을 먹은 뒤 시장 구경도 하고 폐조선소 재활용 공간 카페에서 쉬고, 아들들이 진도 맞춰 살살 걷는 산책이 빛나는 여행이었단다. 무릎수술 안하고 버티며 집에서도 1시간반씩 운동하며 달랜 끝에 조심조심 지냈는데 그야말로 13개월 만의 노는 여행이었고, 봄맞이 맛기행을 제대로 한 듯했다.

나는 식구들이 어딜 가면 상차림이 가장 궁금해서 사진 찍어 보내라고 성화를 댄다. 상 위에는 대구알젓, 꾸덕하게 말린 조갯살무침, 장어조림, 볼락깍두기 등이 맛깔졌는데,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볼락섞박지였다. 십수년 전 여수에서 <여성시대> 생방송 뒤 그곳 사람들과 함께 간 식당에서 맛본, 정신 번쩍 드는 그 곰삭힌 볼락의 맛이 밴 섞박지와 구수하고 뜨끈한 누룽지 한 사발의 맛을 어떻게 잊을까? 사올 수 없을까 물으니 이미 떠났단다. 언니가 아픈데 볼락섞박지 먹으면 벌떡 일어날 것 같다고 전한 다음 좀 사오던지 해보랬더니 조카놈이 “큰이모 아프대?”해서 얻어먹으려고 거짓말한 거라고 한바탕 웃었다.

이젠 식구들 끼니 수발이 힘들지만 그렇다고 안할 도리도 없는 집이라 지친 끝이지만 다시 끙하고 일어서 봄맞이 장보기에 나섰다. 마포 농수산물시장엔 보랏빛 곱게 윤이 나는 제주 콜라비, 제주 월동무, 호박고구마에서 감자까지 봄기운을 입어 다 좋아 보였다. 두 묶음 사서 맡겨놓고 청과상에 들르니 오곡찰밥에 나물, 겉절이까지 푸짐하고 인심 좋게 퍼주며 이거 다 여기서 우리가 먹으려고 만든 거니 가져가 어머니랑 잡숴, 하며 싸주었다. 마지막 떡집에선(우린 아침으로 가래떡구이를 먹는다) 일년에 딱 한번 하는 정월대보름맞이 도시락이라며 어머니께 드리라고 건네시니 참 이게 웬 복인지 모르겠다. 내가 만든 묵나물에 얻어온 오곡찰밥과 나물 그리고 뜨끈하니 달걀찜과 보리굴비를 차려내니 남부럽지 않은 게 아니라 남이 부러워할 정도가 됐다.

1월 말에는 2주에 걸쳐 <당신 참 좋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됐는데 우리집에서 엄마와 녹화를 했다. 더 늦기 전에 당신께 하고픈 이야기를 전하며 따뜻한 밥을 나누는 시간을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하게 된 셈이었다. 엄마는 당신께 태어나 준 열아들 부럽잖은 딸이라며 고맙다 하셨다. 대신 여자 혼자 벌어 먹고살려다 보니 너희 셋 어린 날에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제일 미안하다셨다. 장례식은 어찌할까 여쭈니 화장을 원하시며 강가에 뿌려달라시는데 “안돼! 엄마 그건 불법이야.” 대차게 대답해버렸다.

아버지와 합장은 싫고 장례식도 원치 않으시며 엄마가 좋아하는 동심초를 불러달라셨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모처럼 엄마와 함께 불렀는데 절대음감이셨던 엄마는 이제 더는 음도 정확하지 않고 떨림이 너무 심해 내가 아래턱을 으덜덜덜 떨며 흉내를 내어 웃음을 드렸다. 엄마랑 둘이 마지막 치를 의식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게 찡하더라는 감상평이 많았다. 양껏 이야기 못하고 떠나보내면 모든 후회와 회한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라 서리서리 가슴에 맺힌다는데, 우리 딸 셋과 엄마의 이야기는 이제 슬슬 시작이다.

이번 주말엔 수고한 나와 동료들에게 선물로 느린 산책 같은 음식을 만드는 곳에 예약했다. 우엉밥(오분도미), 된장국, 연근샐러드, 삼치와 무조림, 횡성한우불고기와 쌈, 나물류 3종, 김치와 장아찌, 따뜻한 차와 금귤정과, 계절과일로 마음밥상을 대신하려 한다.

왠지 가슴이 욜랑춤을 추나 싶게 봄바람이 분다. 꽃샘추위가 남았대도 더는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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