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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평화가 지속돼 둔감하고 멍청해진

등록 2023-02-26 18:18수정 2023-02-27 02:37

<맨발의 겐>은 원폭 투하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소년을 통해 전쟁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맨발의 겐>은 원폭 투하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소년을 통해 전쟁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세계의 창] 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는 지난해 말 안보정책 대전환을 결정했다. ‘적기지 공격 능력’을 보유하고 방위비를 5년 내 두배로 증액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중국의 방위력 증강,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발사 등 일본을 둘러싼 안보 환경이 불안감을 높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방위력 강화에 국민적 합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평화국가로 살아왔다. 이 노선에는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강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다모리(77)라는 탤런트가 지난해 말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2023년은 어떤 해가 될 것 같냐’는 질문에 “새로운 전전(전쟁 전)이 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한 것이 크게 화제가 됐다. 다모리는 정치적 발언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국방력 증강, 나아가 대만 유사(전쟁)시 미국과 함께 중국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정부의 태도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게 아닌지 싶다.

‘전전’이란 무엇일까. 현재 일본인 대부분은 전후에 태어나 전쟁이라는 것, 특히 전쟁 전을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다.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문학가의 글을 통해 상상할 수밖에 없다.

전쟁에는 전조가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언론의 자유가 점차 제약을 받게 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가 어려워지는 현상이다. 또 자기 나라와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분위기가 확산한다. 반대로 타국이나 타민족을 멸시하는 담론이 만연하게 된다.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한 1930년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지금의 일본이 90년 전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 건재하고, 야당도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는 점점 형식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학자들에게 보장돼야 할 학문의 자유에서도 위험한 조짐이 보인다. 전쟁 전, 학문이 억압돼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전후 헌법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학자들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단체로서 ‘일본학술회의’가 정부에 제언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최근 학술회의는 군사 연구에 일정한 제동을 거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현재 기시다 정권은 학술회의 회원들의 임명을 학자들끼리 서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위원회를 구성해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학술회의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학자들의 모임이 정부 정책에 간섭하는 것이 불편하니, 회원 선정부터 정부가 원하는 사람을 쉽게 앉힐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적이다. 이런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신경 쓰고 항의하는 것이 피곤할 일이지만 침묵할 수는 없다.

교육계에서도 전쟁의 어리석음과 비참함을 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히로시마 출신 나카자와 게이지(1939~2012)가 그린 <맨발의 겐>은 히로시마 원폭의 비극을 전하는 명작이다. 여러 언어로 번역된 만큼, 한국에도 독자가 있을 것이다. 히로시마시는 이 만화를 공립학교 아이들과 학생들을 위한 평화교육 교재로 사용해왔다.

그러나 최근 히로시마시 교육위원회는 <맨발의 겐>을 교재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피폭의 실상이 전달되지 않고, 초등학생이었던 주인공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남의 집 잉어를 훔치는 장면이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다.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리면 남의 물건을 빼앗아서라도 살아남으려는 것은 전쟁의 실상이다. 그런 사실을 어렸을 때 배우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는 전쟁이나 무력 사용에 반대하는 논의를 ‘헤이와보케’(평화가 지속돼 둔감하고 멍청해진 상태)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고,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대만 유사시 무력 사용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헤이와보케’ 아닐까. 안보정책 전환을 추진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야말로 <맨발의 겐>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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