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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등록 2023-03-01 19:00수정 2023-03-02 02:35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으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정아무개씨가 다니고 있는 서울대 중앙도서관 들머리에 지난 28일 오후 이번 사태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가 아들의 학교폭력 논란으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정아무개씨가 다니고 있는 서울대 중앙도서관 들머리에 지난 28일 오후 이번 사태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지난번 썼던 폭풍우 몰아치던 바닷가 휴양지에서의 추억에 관해 조금 더 써보겠다. 며칠 뒤 폭우가 멈추고 집 나갔던 눈부신 태양이 돌아왔다. 싸가지고 간 일도 마침 다 끝내고 모든 게 출발할 때 떠올렸던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너무 돌아온 게 문제였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던 아이는 수영복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닷가로 여행지를 선택한 장본인이었다. 사춘기 소년의 부모 인내심 테스트가 시작됐다. 조금 있다가 사진 찍지 말라고 버릇없이 말하는 아이의 태도에 열받은 남편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묵언수행에 들어갔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잡지 화보처럼 미소짓는 사람들 사이에 간장 얼룩같이 앉아 나는 ‘인생은 여행과 같다더니 여행도 역시 인생처럼 *같구나’를 곱씹었다. 동반자들에 대한 분노가 임계점까지 끓어올라 아이가 얼빠질 정도로 하드코어 욕을 대방출한 어느날 밤 현타가 왔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돈을 뿌리고 여기까지 날아와서 지금 뭐하는 건가. 본전 생각이었다. 백만원을 들였으면 백만원 어치의 즐거움이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여행자 보험은 왜 이런 손해는 보상해주지 않는가.

짧은 가출을 끝내고 돌아온 나는 태세전환에 나섰다. 더는 손해볼 수 없다는 위기의식으로 ‘물타기’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본 가족드라마의 장면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착한 엄마 발연기를 보면서 내가 욕하던 걸 따라하며 깐족거리는 아이에게 살의를 느꼈지만, 오로지 ‘리스크 헷지’에 대한 절박함은 그 앞에서도 미소를 가능하게 했다. 자본주의 사회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뒷이야기는 뻔한 홈드라마다. 가짜로 웃다 보니 진짜 마음이 녹았고 내가 날을 접으니 다른 날들도 뭉툭해졌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의 마지막 대사는 진심이었다. “즐거운 여행이었어. 나중에 또 오고 싶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라고, 심금을 전혀 울리지 않는 훈화말씀을 나도 종종 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 마지막 도착점이다. 긴 인생에서 가장 공허한 자랑이 ‘왕년에 잘 나갔다’는 말 아닌가.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은 나에게 ‘끝이 좋은 삶이란 어떤 걸까’라는 화두로 남았다.

최근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은 정순신 변호사의 학폭 가해 아들 뉴스를 보면서도 그가 예상했던 또는 바랐던 결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과정’의 결정체인 대학민국 고등학교에서 아이가 학교폭력 가해자가 됐을 때, 부모의 머릿속에는 명문대 입학이라는 도착점 말고 다른 생각이 있었을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니까, 그래서 재심을 청구하고 행정소송을 하면서 과정의 물타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결국 소송도 패소하고 강제전학가기는 했지만 학폭 가해자인 아이는 좋은 ‘결과’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서울대 입학이라는, 끝이 좋은 학창시절을 마쳤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검찰 고위간부 아들이 학폭 가해자라는 지상파 뉴스까지 있었지만, 더 좋은 결과, 더 높은 성공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정순신과 임명권자들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했으리라. 자랑스러운 명문대생이 된 아들 역시 더 좋은 결과, 더 멋진 결말을 꿈꾸며 대학생활을 했겠지.

‘과정에 불과했던’ 그 과정들이 다시 하나하나 호출되리라고는, 그리하여 그 과정이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리라고는 정씨도 그에게 한자리 나눠주려고 했던 이들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더 글로리>의 연진이 말마따나 없는 것들이나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를 믿는다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지금도 오늘의 결과가 인생의 마지막 결과는 아니라고 정신승리하면서 노선을 바꿔 다른 결과, 더 멋진 도착점을 준비할 수도 있겠지. 가해자 아들에게도 개명하고 유학 다녀오면 더 잘될 수 있을 거라고 더 멋진 미래가 기다릴 거라고 격려하면서 말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내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합격한 학생이나 찍은 게 다 맞아서 합격한 학생이나 같은 등록금 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찍은 게 다 맞는 일 따위는 인생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학폭 가해자도 대학에 합격할 수는 있다. 주어진 조건을 채우는 노력으로 얻은 결과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인생의 모든 과정은 최종의 결과에 어떤 흔적으로 때로는 얼룩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옷을 세탁해 건조하면 얼룩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얼룩은 서서히 다시 올라온다. 내가 좋은 엄마 발연기를 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의 여행은 끝까지 간장 얼룩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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