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기레기’는 울지 않는다

등록 2023-03-02 19:58수정 2023-03-03 02:38

서울 국회 정론관 내 기자회견장. 박승화 선임기자
서울 국회 정론관 내 기자회견장. 박승화 선임기자

선담은 | 정치팀 기자

언제부턴가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말에 무감각해졌다. 표현의 수위를 높인 ‘기더기’(기자+구더기)란 조롱에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데, 2~3년 전쯤 한 누리집의 글을 본 게 변화의 계기가 됐다. 시민들이 언론을 감시한다며 ‘문제적 보도’ 리스트를 만들고 해당 기사를 쓴 기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커뮤니티였다. 그곳에서 내가 ‘기레기’로 찍히게 된 기사들 중 ‘최악의 보도’ 1위로 꼽힌 건, 2019년 8월 한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을 보도한 기사였다.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대학 입학 과정을 놓고 사회적 논란이 일자, ‘구의역 김군’의 동료 등 특성화고 출신 청년들이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이마저도 ‘있는 사람들’끼리의 논란이 아니냐”며 “조 후보자가 ‘흙수저’ 청년들의 문제를 제대로 살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지금까지도 그 기사가 왜 ‘기레기 기사’로 꼽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누군가 이 기사를 자신의 블로그에 공유하며 남긴 “조국 죽이기 그만해라”, “‘구의역 김군’ 그만 팔아라, 있었던 동정심도 사라질려고 한다”는 글에서 이유를 짐작할 따름이다.

기사의 팩트가 틀렸다거나, 사회적 약자를 곤란에 빠뜨리는 기사였다면 독자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비슷한 일들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귀를 닫게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억울함, 분노, 원망 같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갔다. 어느 날, 같은 고민을 공유하던 기자들 사이에서 이런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기레기’가 되지 않으려고 힘들게 고생해서 쓴 기사도 인터넷에선 10원 한푼도 못 받는데,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언론사와 기자들이 문제가 없다거나, 괜히 욕먹어서 억울하다는 얘길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 언론은 보도 관행이든 출입처 문화든, 여전히 많은 비판과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선 사례처럼 정당한 이유를 찾기 어려운 무차별적 ‘쓰레기 기자 비난’에 노출될 때, 직업인으로서 한 개인은 회의와 냉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 나은 기사를 쓰려고 ‘노오오력’을 하고, 어떤 독자들에겐 “좋은 기사 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기사도 또 다른 독자들로부턴 ‘기레기’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니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멘붕’이 오는 거다. 지금의 ‘기레기’ 비판 담론이 조롱과 망신주기 수준을 넘어 좀 더 정교해지길 바라는 이유다.

나아가 언론이나 기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포털에 종속된 뉴스 소비 메커니즘의 문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길 기대한다. 5년 전 겨울, 한 대기업이 임원 운전기사 100여명을 불법으로 파견받은 혐의로 기소될 상황에 놓이자, 회사 쪽이 고용노동부 조사를 앞두고 기사들에게 모범 답안을 교육해 입 맞추기를 했다는 기사를 썼다. 기사가 출고되고 서너시간 뒤 포털 뉴스 검색란에서 해당 기업 이름을 검색했더니, 내 기사가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대신 검색 결과 첫페이지엔 이 기업이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거액을 기부했다는 홍보성 기사 수십개가 줄을 이었다.

포털에서 기사를 검색하면, 출고한 시간순으로 검색 결과가 뜨는 점을 이용해 회사에 불리한 기사를 덮은 것이다. 물론, 이 대기업과 특정 시간대에 단순 홍보기사를 몰아서 출고한 언론사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저널리즘의 원칙보다 기사를 더 많이, 빨리 쓰는 언론사가 뉴스 배열에서 가중치를 받고, 그것이 곧 회사의 수익으로 연결되는 구조에선 이런 일이 더 잦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법조기자단을 백번 천번 해체하고 출입처 제도를 폐지한다고 한들, 좋은 기사를 만들기 위한 기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합당한 보상을 받는 구조 없이는 ‘기레기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개혁의 대상이라면 ‘기레기’에게는 뼈를 때리는 아픈 비판을, 좋은 기사엔 그에 맞는 ‘제값’을 쳐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su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가상자산 과세,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1.

가상자산 과세,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발 가짜뉴스에 돈 내야 할 한국 2.

우크라이나 전쟁발 가짜뉴스에 돈 내야 할 한국

상법개정 반대 ‘궤변’, 1400만 투자자가 바보인가 [아침햇발] 3.

상법개정 반대 ‘궤변’, 1400만 투자자가 바보인가 [아침햇발]

범죄·코믹·판타지 버무렸다…볼리우드식 K드라마의 탄생 4.

범죄·코믹·판타지 버무렸다…볼리우드식 K드라마의 탄생

‘두 얼굴의 트럼프’ 앞에 선 중국의 불안과 기대 5.

‘두 얼굴의 트럼프’ 앞에 선 중국의 불안과 기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