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가끔 홍대 길거리를 걷다보면 한 손에는 책을 든 채 어마어마한 양의 폐지가 실린 리어카를 끌고 가시는 분을 만날 수 있다. 이분을 보면 정말 도의 경지에 이른 분 같다. 마치 어마어마한 양의 인생의 무게를 짊어진 듯이 리어카를 끌며, 한손에는 책을 쥐고 있다가 신호대기 할 때면 책을 꼭 읽는다. 그리고 신호가 바뀌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보면 무거운 인생의 무게와 책 한 권의 무게가 시소처럼 평형을 이루는 것 같이 느껴진다. 가까이서 보면 이분은 책을 1/4권 정도로 분권해 다닌다. 무게도 가벼워지고 접어서 읽기도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내공이 아니다. 이분은 리어카에 실린 짐의 무게에 몸을 살짝 실어 구름 위를 걷는 듯 힘의 낭비 없이 경공(몸을 가볍게 하는 중국무술)법처럼 이동한다. 왠지 읽고 있는 책이 무협지일 것도 같다. 자세도 곧으시고 술병을 들고 다니는 것도 못 봤다. 건강한 노동과 꼭 필요한 만큼의 소유, 그리고 자신이 즐거워하는 독서까지. 현대판 실천하는 철학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힌트는 책에 있지 않을까? 사실 책을 예찬할 정도로 많이 읽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 책이라는 바다에서 낚시하듯이 낚아 올린 ‘나를 살린 한 문장'들이 있다.
군대 시절 불침번을 서면서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온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 인간은 파괴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명대사는 아직도 인생 문장으로 남는다.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비아냥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그물을 손질하며 바다에 나간 노인. 마침내 사투 끝에 잡은, 배에 실을 수도 없이 커다란 청새치. 결국 배에 끈으로 묶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앙상한 뼈대만 남은 청새치. 그러나 노인의 모습이 결코 허무하지 않았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 과정 자체가 살아가는 의미다. 노인이 사투 끝에 커다란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책이라는 바다에서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라고 생각해'라는 한 문장을 낚았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장엄한 드라마다. 책장을 덮고 불침번 근무가 끝나고 나서 바라본 밤하늘에선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잘하고 있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책이 마법 같은 이유는 시공간과 언어를 초월해서 지혜의 말씀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삶이 막막하게 느껴지고 탈출구가 없다고 느껴질 때, 책을 펼쳐보면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타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다가온다. <갈리아 원정기>에서 베르킨 게토릭스를 포위하지만 상대방 지원군에게 또 샌드위치처럼 포위를 당하는 상황, 카이사르는 포기하지 않고 성벽을 이중으로 쌓는 기지를 발휘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전투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이고 예술적으로 했던 카이사르 형님은 절대로 목표를 포기하지 말라는 힌트 주머니를 던져준다. 그리고 권력에 취해 독재를 하면 나처럼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고도 얘기해 준다.
책장을 덮으면 그 안의 글자들이 살아 움직일 것 같다. 신들이 존재하고 그림 속의 물감의 온도가 느껴지며, 모험이 있고 별이 있고 낭만이 있다. 책은 살아 있다.
고전은 최고의 액세서리다. 예쁜 하드커버의 고전이나 <안나 카레니나>나 <오만과 편견> 같은 책을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차를 마시는 사람을 보면 어떤 명품가방을 든 사람보다도 빛이 난다. 내가 읽기라도 한 책이라면 속으로 반갑고 왠지 호기심이 갈 정도다.
고전이 잘 차려진 밥상이라면 에세이는 디저트 같고 비타민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면 소설가의 덕목이 성실한 자기 관리를 위한 달리기라고 말한다. 소설가는 허리에 살이 붙으면 끝이라고 말한다. 어디 소설가뿐만이겠나? 오랫동안 무대 위에서 즐겁게 음악 하려면 운동은 필수다. 분한 일을 당해도 달리기를 하면 화를 내는데 에너지를 쓸 겨를도 없다고 한다.
고전과 에세이가 밥 같고 비타민 같다면 시집은 향수 같다. 흑백티브이 같던 감정과 일상에 색깔과 향기를 입히는 것 같다.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걷는 곳마다 향기를 남기고 간다. 어떤 계절은 과일로 만들 수도 있고, 안리타의 시처럼 모든 계절을 유서로 남길 수도 있다.
3월이다. 초록 계절이 되고 새로 시작하기 좋은 시기이다. 오랜만에 가볍게 책장을 열고 마음속에 글자를 심어 가을에 좋은 열매를 맺으시길 바란다.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진다면 삶의 시소 반대편에 좋은 책과 함께 서서 균형을 맞추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