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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마음이 느껴지면 얘기는 끝난다

등록 2023-03-12 19:16수정 2023-03-13 02:33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친구 어머니께서 노인전용 아파트에 들어가셨다. 짐이 너무 단출해서 보니 세면도구, 화장품 두개, 잠옷 그리고 외출복 3벌이 전부였단다. “아니 그 많은 옷 다 어쩌시구 이렇게 조촐해요? 3벌이 뭐예요?” 어머님 대답은 “유일한 외출이라야 병원 다니기인데 봄·가을옷 한벌, 여름·겨울옷 각 한벌씩이면 되지, 무에 더 필요하냐?” 하시더란다. 연극배우이신 어른은 차도 팔고 옷, 가방, 구두, 모자 다 후배들께 나눔하고 나이 여든 넘어 전철로 두루 다니시면서도 늘 강건하셔서 단호한 정리가 존경스러웠다.

요즈음 우리는 동물병원에 주 2회(17살 미미가 투석 대신 피하수액을 맞아야 한다), 어머니 모시고, 또 우리 부부 진료로 석달에 한번씩 병원행이다. 또 치과도, 이비인후과도 가는 등 병원 순회를 피할 수 없다. 동물병원에선 수심에 찬 보호자들끼리 서로 병명과 증세를 나누며 위로한다. 그제는 죄 우리 미미와 동갑내기인 17살짜리 소형 견공들이었는데, 사람으로 치면 아흔살 넘은 노견들이었다. 수술실 안쪽 케이지 앞에 한 젊은이가 무릎 꿇고 하염없이 울며 손을 케이지 안으로 넣어 냥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엉~ 어엉엉~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한달반 동안 주 2회 피하수액을 맞은 미미는 좀 좋아진 듯 어제는 까치발을 든 채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길래 “나갈까?” 하니 아이처럼 뛰어든다. 쵸코까지 동행한 산책에서 나를 아예 끌고 다닌다. 산책하다 그냥 쓰러지는 심정지 발작이 겨우내 두번이나 와서 삼갔는데, 이제 날도 풀렸겠다 슬슬 산책도 시켜야지.

봄기운이 돌면서 가끔 어디 잘 챙겨둔다고 둔 물건의 행방이 묘연해 뒤지느라 난리를 쳤다. 운전면허증을 샅샅이 찾다 보니 덕분에 서랍과 핸드백 정리도 끝냈다. 이게 대체 살 노릇인가? 남편의 제주도 나들이 덕에 도시락 싸기와 저녁상 차리기가 간단히 해결돼 엄마 모시고 저녁 외식을 하려다 어스름 쌀랑한 바람에 그만 마음이 변했다. “엄마, 그냥 집에 있자.” “그래, 집에 있는 거 먹자. 너도 쉬고…. 아유 근데 왜 이렇게 미역국 생각이 날까?”

그제 낮에 누가 선물로 준 미역을 보셨나? 모처럼 소고기 넣고 후딱 끓였는데 맛있어서 건더기 많이 넣어 한사발씩 뜨끈하게 총각김치 곁들여 먹었다. 조촐한 밥상이었지만 평범한 미역국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영혼의 음식이 돼줬다. 홍합이나 바지락살 넣고 끓이는 평소보다 새로운 맛은 우리집 간장+까나리액젓+참치액젓+멸치액젓을 섞어 간을 했기 때문인가? 젊은 날엔 국물에 관심 없었다. 헌데 몸이 메마르듯 입안도 국물 없이는 허전하고 뻑뻑해 언젠가부터 맑은국을 꼭 끓인다.

하루 두번 약 먹이고 안약 넣어주는 강아지들 수발까지 마치고 쉬려는데, 멀리 바다 건너 미국 내슈빌에 사는 친구가 시 한수를 보내왔다.

봄을 빨리 맞으라고/ 2월은/ 숫자 몇개를 슬쩍 뺐다.// 봄꽃이/ 더 많이 피라고/ 3월은/ 숫자를 꽉 채웠다. (신복순 ‘이월과 삼월’)
안부도 묻지 않고 그냥 달랑 시 한편 보냈지만 친구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렇듯 마음이 느껴지면 얘기는 끝난다.

‘여성시대’ 앞으로 홈쇼핑 담당자 편지가 왔는데 어르신들이 선호하는 상품을 파는 곳이라 부모뻘 되시는 분들이 주 고객이란다. 어떤 상품 주문해드릴까요. “음~ 몸에 좋은 거 그거… 그거 청소도 할 수 있더만 진짜 깨끗하게 된다네.” 신용카드 유효기간은 어떻게 되죠. “엄청 길어. 얼마 전에 발급받았어. 길어서 괜찮아.”

통화는 늘어나고 짜증도 났지만, 스마트폰 잘못 쓰시는 친정엄마 생각에 ‘내 부모라 여기고 천천히 전화 받자! 울엄마도 사고픈 걸 못 사면 얼마나 답답하실까?’ 다짐한 뒤엔, 더듬대며 주문하고 여러번 통화해도 괜찮고 전화기 너머 그분들의 삶이 들리기 시작하더란다.

“우리 아들, 지금 아파서 쉬고 있어.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그래서 이거 보내고 싶어.” 주소를 한자 한자 불러주시는 어머님께 ‘아드님 꼭 좋아지시기를’ 통화 내내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허리 아파 통 일을 못했다”며 허리벨트 주문하는 과수원 어른께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조금씩 쉬면서 하시라”는 진심도 전했단다. 그렇게 마음을 전하며 도와드리다 보니 “오늘, 나는 행복하고 기분 좋게 누군가의 주문을 도와주러 일터로 가보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출근하게 되더란다. 정해진 하루 주문량을 못 채우겠다는 조급함에서 마음자리를 바꾸니, 전화기 너머 그분들의 삶이 들리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평범 속의 비범, 소통 상대를 헤아리는 진심 어린 기도가 정말 보약 같은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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