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지식인이 국뽕에 취해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아연한 건 어쩔 수 없다. 알엠의 답변은 제법 재치 있긴 했지만 그리 현명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형적인 ‘그쪽이야말로주의’(Whataboutism)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왓어바우티즘, 그쪽이야말로주의는 상대가 잘못을 지적하면 ‘너야말로!’ ‘사돈 남 말 하네!’라고 받아치는 것이다.
방탄소년단(BTS) 리더 알엠(RM). 방탄소년단 페이스북 갈무리
박권일 | 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방탄소년단(BTS) 리더 알엠(RM)이 스페인 매체 <엘 파이스>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화제다. 정확히 말하면 ‘추앙’받는 중이다. 케이(K)팝의 “젊음과 완벽성, 과도한 훈련에 대한 숭배”에 관해 기자가 묻자 알엠은 이렇게 답했다. “당신들은 영국, 프랑스처럼 과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성공했지만, 우린 7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나라였어요. 죽어라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여기까지 온 거라고요. 물론 그림자는 있지만 빠르고 격렬하게 일어난 모든 일엔 부작용이 있는 법이죠.”
이 대답에 다들 “통쾌하다” “후련하다” “역시 똑똑하다”며 야단법석이다. 대중이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언론과 지식인들까지 호들갑에 적극 동참하는 꼴을 보니 쓴웃음이 나온다. 언론·지식인이 누구보다 국뽕에 취해 있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아연한 건 어쩔 수 없다. 알엠의 답변은 제법 재치 있긴 했지만 그리 현명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형적인 ‘그쪽이야말로주의’(Whataboutism)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왓어바우티즘, 그쪽이야말로주의는 상대가 내 잘못을 지적하면 ‘너야말로!’ ‘사돈 남 말 하네!’라고 받아치는 것이다. 기초논리학에서 배우는 ‘피장파장의 오류’와 비슷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우리는 ‘참’인 명제 두개를 알고 있다. ①서구가 쌓은 번영의 이면에는 식민지 착취가 있다. ②케이팝 영광의 이면에는 과도한 훈련, 갑질, 청소년 억압 등이 있다. ①과 ②는 모두 참이며 이에 대한 비판은 합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②에 대한 지적을 ①에 대한 지적으로 대응하면 일종의 동문서답이 되고 만다. 그건 상대의 잘못을 끄집어내 내 잘못을 정당화하는 진술이다. 그쪽이야말로주의는 냉전기 소련의 선전술이었고 지금은 북한과 중국이 인권탄압 지적에 맞서 내미는 논리이며 한국의 정치인 및 브로커들, 특히 이준석류와 김어준류가 가장 잘 써먹는 논법이다.
케이팝의 “그림자”는 으레 있는,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할 심각한 사회문제다. 얼마 전에도 그룹 ‘오메가엑스’ 사례를 통해 <뉴욕 타임스>가 케이팝 소속사-가수 사이 착취 논란을 다뤘는데, 이를 두고도 일각에서는 여지없이 “케이팝을 질투한 서구 언론의 흠집내기”라는 식의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한국 문화산업 전반에 상존하던 문제다. 서구 언론을 포함해 문제 제기가 잇따라 터져 나오지 않았다면 그동안 당연하게 넘어갔던 부조리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어려웠을 테고, 표준계약서 대신 관행이라는 미명 아래 아직도 ‘노예 계약’이 횡행하고 있을 것이다.
케이팝의 눈부신 성공이 이 문제들을 가릴 수 있다고 여긴다면 또 하나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 말이다. 전체 사례 중 성공 사례만 주목해 그보다 훨씬 많은 실패 사례는 보지 못하는 인지적 오류다. 한국인의 유난스러운 능력주의 선호, 특히 사법시험에 대한 각별한 사랑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에 너무나 많은 청년이 사법시험에 매달리다 ‘사시 폐인’이 되어 인생이 망가졌다. 그럼에도 극소수 합격자의 사례만 주목해 사법시험을 “가장 공정한 경쟁”이라 칭송하며 ‘사시 부활’을 외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케이팝도 마찬가지다. 극히 예외적 성공이라 할 수 있는 방탄소년단 같은 경우를 가지고 케이팝이나 케이컬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아무리 승자독식 경향이 강한 대중문화 영역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무명의 연습생이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꿈을 향해 달릴 수 있게 하는 것, 그건 제2의 방탄소년단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 아닐까.
역사상 한국 문화의 위상이 가장 높은 시대라고들 한다. 그런데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은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자살하고 있다. 2021년 기준 아동·청소년 자살률은 10만명당 2.7명에 달한다. ‘진짜’라는 말, ‘선진국’이라는 말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만 따옴표 붙여 쓰겠다. ‘진짜 선진국’은 자기 허물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나라다. 진정 강한 나라는 강자·승자만 바라보는 나라가 아니라 다치고 쓰러진 이를 오롯이
돌보는 나라다. 식민주의 극복은 새로운 제국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나라도 식민지가 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