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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사람이 데이터로 기억될 수 있을까

등록 2023-03-30 18:19수정 2023-03-31 02:37

이제 사람은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은 이름이나 물건을 남길 뿐만 아니라 각종 데이터를 남긴다. 우리는 그 데이터를 그 사람의 일부로 생각해 그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면서 망자를 기억한다. 더 나아가 그 데이터를 잘 가공하면 죽은 이를 다시 구현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리버스 오브 서지원> 앨범 표지. 옴니뮤직 제공
<리버스 오브 서지원> 앨범 표지. 옴니뮤직 제공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이제는 전설이 된 1990년대 모던록밴드 ‘유앤미블루’의 멤버였고 이후 영화음악가로 활약했던 방준석씨의 솔로 앨범 <템페스트>가 지난주에 발매됐다. 방준석씨는 지난해 이맘때 세상을 떠났으니 유작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를 사랑했던 동료들이 그가 남긴 음원 데이터를 정리하고 다듬어서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다. 영화나 음반에서 다른 이들이 불렀던 그의 곡을 그가 직접 부른 것도 여럿 실었고, 지금껏 발표된 적 없는 곡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동료들은 또 1주기를 맞아 그의 노래를 부르거나 그가 노래하는 음원에 맞춰 함께 연주하는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고 한다. 짧은 보도조차 없었던 이 소식은 <문화방송>(MBC) 라디오 <에프엠(FM)영화음악 김세윤입니다>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번주에는 1996년 열아홉살로 세상을 떠나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가수 서지원씨의 새 앨범이 공개됐다. 그가 생전에 좋아했다는 이승환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를 서지원의 목소리로 담아낸 작품이다. 그의 유작이 된 히트곡 ‘내 눈물 모아’를 기억하는 팬들은 그의 새 노래가 무척 반가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신곡을 서지원의 유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가 직접 부른 노래가 아니라 디지털 기술로 그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생성해 만든 노래이기 때문이다. 제작사가 붙인 앨범 제목 <리버스 오브 서지원>(서지원의 부활)도 그가 세상에 남기고 떠난 노래가 아니라 그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노래라는 점을 암시한다.

세상을 떠난 가수의 목소리를 인공지능 기술로 재현해 그가 생전에 부르지 않았던 노래를 부르게 하는 시도는 여러차례 있었다. 가령 1996년 세상을 떠난 김광석이 2002년에 나온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부르는 식이다. 가수의 목소리와 흡사한 인공지능 목소리에 놀라는 동시에 가수와 노래 사이에 어긋난 시간 순서에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곤 한다. 서지원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는 이런 경향을 살짝 비켜나가고 있다. 그는 이 노래를 알았고 또 부른 적도 있다. 팬미팅에서 반주 없이 한 소절을 부른 것이 녹음돼 있었고, 그 실제 목소리가 새로 합성된 노래 앞부분에 들어갔다. 이런 설정은 서지원이 인공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을 더 그럴듯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사람의 목을 울려 나오지 않은 목소리들에 둘러싸여 있다. 안내방송 목소리, 전자책 읽어주는 목소리 등은 몸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목소리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됐고, 이런 목소리들은 우리 주위를 자연스럽게 흘러다닌다. 서지원의 신곡 같은 목소리 복원 프로젝트는 그런 인공의 목소리를 익명으로 두지 않고 거기에 단 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주려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인공지능 목소리를 생활에 편리한 기능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통로로 삼겠다는 것이다.

며칠 사이 나온 두 앨범에서 망자의 목소리라는 데이터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두가지 태도를 볼 수 있다. 둘 다 망자의 목소리를 재생하고 있지만, 하나는 방준석의 목을 통해 나온 목소리이고 하나는 서지원의 목에서 출발했으나 결국은 그로부터 분리돼 생성된 목소리다. 방준석의 동료들은 그의 컴퓨터에 남은 노래 데이터를 정리해 공유하고, 또 그 노래들을 함께 부름으로써 그의 삶과 음악을 기리고자 했다. 서지원 앨범 제작자는 그의 목소리 데이터를 가지고 그가 남겼을 법한 노래, 그러나 실제 남기지는 않은 노래를 생성함으로써 너무 일찍 떠난 스타를 되살리려 했다. 두 사람의 두가지 목소리는 듣는 사람마다 다른 기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제 사람은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은 이름이나 물건을 남길 뿐만 아니라 각종 데이터를 남긴다. 우리는 그 데이터를 그 사람의 일부로 생각해 그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면서 망자를 기억한다. 더 나아가 그 데이터를 잘 가공하면 죽은 이를 다시 구현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그를 몹시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신체와 정신을 통과하지 않은, 그의 몸과 마음이 닿지 않은 것으로 그를 기억할 수 있을까?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이 함께 필요한 문제다. 다만 내게는 미발표곡 ‘홈’을 부르는 방준석의 목소리가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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