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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일과의 적정 거리

등록 2023-04-13 18:24수정 2023-05-18 11:07

지난달 20일 오전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교육장에서 ‘윤석열 정부 노동시간 개악안 폐기투쟁’ 발표 기자회견이 열리는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구로디지털단지와 정동길 등에서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직장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지가 세워져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달 20일 오전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교육장에서 ‘윤석열 정부 노동시간 개악안 폐기투쟁’ 발표 기자회견이 열리는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구로디지털단지와 정동길 등에서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직장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지가 세워져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김민제 | 노동·교육팀 기자

“일단 내일은 아프지 말아야지.”

며칠 전 스스로 한 다짐에 조금 놀랐다. 중요한 업무가 아직 남아 있는데 몸이 영 찌뿌둥해, 컨디션을 잘 관리하자며 혼잣말을 한 참이었다. 뱉어놓고 보니 악덕 고용주도 직원 면전에 대고는 차마 하지 못할 매정한 말 아닌가. ‘일하려는 자, 아프지도 말라’며 다른 이도 아닌 내가 나 스스로를 노동력으로만 취급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하고 있던 일에 과잉 몰두해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져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경고를 날렸다. ‘적정 거리 유지!’

나에게 있어 일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일을 잘하는 방법 못지않게 궁금하고 어려운 영역이다. 업무역량 개발에 시간을 투자하듯 일과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해서도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먼저 출근길에 직업 생활은 인생의 전부가 아닌 일부라는 당연한 사실을 굳이 되새긴다. 퇴근 뒤에는 뉴스와는 조금의 관련도 없는 유튜브 영상을 두세편 보고, 꾸역꾸역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필라테스 학원으로 향한다. 주말에는 편한 친구를 만나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려도 그만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 휴대전화는 취재원이나 회사의 연락으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울리고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 보니, 과도한 일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나름의 장치들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이런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막 입사한 5년 전만 해도 나는 무려 ‘일과 삶의 균형이 없는 상태를 지향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소리지만, 그때의 나는 퇴근 시간만 바라보며 사는 직장인이 되기보다는 일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일이 곧 인생이 돼버린 사람을 동경했다. 다행히 이런 나의 포부를 눈여겨 바라보며 격려해준 이는 회사에 없었고, 일과 삶의 구분이 없어질 만큼 많은 일을 떠맡는 불상사도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포부는 1년이 채 안 돼 사라졌다. 지금은 ‘칼퇴근’이라는 목표를 추진력 삼아 일하고 있다. 빠른 태세 전환은 일에 과몰입했던 시간이 즐겁기보단 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업무 과몰입 상태에서는 기자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아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기사라는 매일의 결과물을 통해 회사 안팎에서 평가를 받는데, 기자로서의 자아가 비대하니 결과물의 가치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를 달리 매기고 있었다. 당연히 평가 내용에 따라 기분도 널을 뛰었다.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소중한 사람과 소박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기회를 날리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되 그 일이 내 생활을 집어삼키진 못하도록 하자는 지금의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결론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있었다. 그것은 일상에서 여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일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자기암시나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일 이외의 것들로도 인생을 채워야 한다. 하루, 일주일의 대부분 시간을 일하며 보내는 사람에게 그럴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일과의 거리 유지에 진심이면서도 실제로는 거리두기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기도 하다. 초과노동이 잦은 직업 특성상 퇴근하고 다음날 출근 때까지 자는 시간을 빼면 시간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짬을 내 취재나 기사 작성과 무관한 무언가를 할라치면 금세 졸음이 쏟아진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이 현실화할지, 기자가 아닌 직장인의 한 사람으로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육체적 피로 누적과 과로사 위험이 아니더라도, 일상이 온통 일에 치여 팍팍하게 살아가는 암울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일과의 적정 거리 유지에 실패한 나머지 직장에서의 업무 성과에만 일희일비하며, 녹초가 된 채로 스스로와 주변인을 돌아볼 여력은 없는 매정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에 한발짝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역시나 일과 시간을 넘겨 늦은 밤 이 글을 쓰는 나의 심경이다.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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