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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위선을 옹호함

등록 2023-05-03 19:07수정 2023-05-04 14:04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편집국에서] 이세영 | 전국부장

서울중앙지검에 ‘선제 출석’한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검찰이 청사 안에 들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정권이 바뀌기 전 집권당 대표까지 지낸 그였으니, 검사도 아닌 민원실 직원에게 ‘커트’당해 내쫓긴 자기 처지가 머쓱하다 못해 치욕적이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그가 리버럴 세력의 중핵인 86그룹의 맏형으로 통해왔다는 점에서, 그날의 수모는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그가 대표해온 세력의 집단적 굴욕에 가까워 보인다.

여당과 보수언론은 그가 연루된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을 고리 삼아 오랜 적대 관계인 86그룹의 정치적 파산 선고를 받아내고 싶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설정한 전략적 공세 지점이 진보·정의를 표방해온 이들의 ‘위선’이다. 이미 그것은 2019년 조국 사태를 거치며 진보·리버럴에 따라붙는 치욕의 꼬리표가 됐으니, 지금의 보수엔 그보다 더 수월한 공격거리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는 위선에 치를 떠는 도덕론자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정치인에게 어느 정도 위선은 허용해야 한다는 관용론도 엄연히 존재한다. 심지어 정치 영역의 위선은 적극적으로 장려돼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다. 속마음을 감춰 선함을 가장하는 행위 없이는 ‘공공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 자체가 작동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도 이런 생각을 공유한다.

아렌트는 공적 이슈를 다루는 공간(폴리스)에서는 공개적으로 표출할 수 없는 내밀한 이해와 욕망이 아닌, 밖으로 드러나는 견해와 주장들만 쟁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죄의 유무를 다투는 법정에서 말해지거나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은 속마음이 사법적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겉과 속을 구분하고 그 일치 여부에 따라 진실인지 위선인지를 따지는 것은 정치 세계에선 부질없는 일이다.

비단 정치뿐이겠는가. 피터 버거 같은 사회학자는 사회 역시 속이고 속아주는 ‘기만의 상호작용’ 없이는 지탱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가족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숱한 긴장과 불화 속에 존재하는 가족이 ‘남편인 척’ ‘아내인 척’ 하는 가식의 퍼포먼스 없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이 원초적 공동체를 깨고 싶지 않다면 그 ‘척’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섣불리 파헤치려 들어선 곤란하다. 너와 나의 위선으로 쌓아 올린 공모의 공동체가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선의 불가피성과 그것의 ‘의도되지 않은 생산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위선을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위선은 정치와 민주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타인과 자기 자신마저 파괴한다.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위선에 대해 경고한다. 이 파괴적 위선은 상대뿐 아니라 자신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데 성공할 때, 다시 말해 자신의 말과 행위가 내면의 순수 동기와 진정으로 일치한다고 확신할 때 작동한다.

이런 심리 상태에 사로잡힌 이들은 오직 자기만이 진실에 충실할 뿐, 타인들은 모두 거짓 연기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이 정치를 주도할 때 나타나는 게 ‘진정성의 폭력’이다. 모든 판단 근거를 겉에 드러난 말과 행동이 아닌 내면의 순수 동기에 둠으로써 타인의 진정성을 부단히 의심하고 공격하는 행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들의 경합’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고, 정치는 선악의 쟁투로 변질된다. 지난 정부 시절 검찰·언론개혁 이슈를 둘러싸고 빚어진 여야의 극한 대치, 요즘의 민주당을 뒤흔드는 ‘수박 공방’이 그런 경우다.

한가지 분명한 건 ‘진정성'의 잣대가 모든 정치적 판단을 지배하는 순간, 정치라는 ‘위선의 게임’은 생사를 건 폭력의 대결로 치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피하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참가자가 가면을 쓴 역할극의 배우임을 인정하고 주어진 룰 안에서 경쟁적 우위를 확보하려 분투하는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상대의 목숨을 노린 무규칙의 이종격투를 보호구와 글러브를 끼고 하는 링 위의 게임으로 바꾸는 것, 카를 슈미트가 말한 ‘적과 동지’의 파괴적 적대를 ‘우리와 그들’의 경합적 적대로 전환하는 것이다. 정치란 ‘위선의 글러브를 끼고 벌이는 권투 경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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