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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왜?’라고 물을 수 없는 어떤 취재

등록 2023-05-11 19:18수정 2023-05-12 02:39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박지영 | 이슈팀 기자

“기자님, 이 기사는 그냥 쓰지 마시죠.”

지난달 서울 강남구 한 빌딩에서 10대 여학생이 투신한 사건과 관련해 취재하던 중 한 법조인이 대뜸 건넨 말이다. 당시 경찰은 해당 여학생이 숨지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던 20대 남성을 자살방조 등 혐의로 입건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숨진 여학생을 온라인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에서 만난 이 남성이 여학생이 숨지기 직전까지 동반자살을 모의한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남성이 함께 건물에 올라가지 않았으나,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 등을 토대로 해당 남성이 숨진 여학생과 나눈 대화 등을 확인하고, 법리를 검토한 결과 자살방조 혐의가 확인됐다”고 했다.

이 남성의 행위를 경찰 판단대로 자살방조로 볼 수 있는지, 자살방조죄 구성요건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묻기 위해 급한 대로 언론 인터뷰 경험이 많은 법률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쓰지 마시죠’라는 말부터 듣자 말문이 막혔다. 평소 같았으면 ‘그건 기자가 판단할 일’이라 여기며 어떻게든 질문을 이어갔겠지만, 그날만큼은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긴 하죠….” 자신 없는 투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가 ‘기사 쓰지 말라’고 한 건 2차 가해를 우려해서였다. 자살방조 혐의를 따지려면 숨진 당사자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나 두 사람의 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이는 곧 숨진 학생을 향한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또 이야기를 파고들다 보면 ‘당사자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자살 동기 등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한국기자협회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지키려면 ‘왜’라는 물음은 기사에 담을 수 없었다. 사건의 배경과 맥락은 생략하고 경찰 수사 결과와 범죄 구성요건 등 최대한 건조한 내용만 담아 기사를 썼다.

그날 이후로도 청소년들의 극단적 선택과 관련한 기사를 3개 더 썼다. ‘우울증 갤러리를 차단해달라’는 경찰 요청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울증 갤러리에서 만난 10대 여학생 두명이 또다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서울 강남구에서 10대 학생이 투신한 이후 하루 평균 자살 관련 신고 건수가 30% 증가했다는 뉴스가 내 이름으로 나갔다.

평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지면 제도의 허점이나 필요한 대책을 담은 후속 기사를 내보내고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엔 기사를 쓸수록 불특정 다수를 향한 죄책감이 마음 한쪽에 쌓여갔다. 긍정적인 변화까지는 아니어도 내 기사가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데 일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오만 아닐까, 내가 쓴 기사가 누군가의 극단적 선택을 부추긴 건 아닐까…. 답답한 마음에 찾아본 자살보도 권고기준 속 ‘잘못된 자살보도는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콕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하고 기사 쓰는 게 기자의 일이라면 ‘왜’라는 질문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걸까. 고립된 청소년들이 자신의 고민과 아픔을 나누고,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은 왜 아직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건지. 지난 2019년 이른바 ‘엔(n)번방’ 사건 이후 온갖 법이 개정됐지만 왜 아직도 온라인에선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지. 청소년들이 자주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기업은 윤리규정 강화나 각종 혐오·차별을 조장하는 게시물 차단에 왜 이토록 소극적인지. 우리 어른들은 왜 벼랑 끝에 선 청소년들에게 제때 손을 내어주지 못했는지. 10년째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극단적 선택’인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꾸기 위해 언론이 던져야 할 질문들을 정리하자니, 막연함과 아득함이 밀려온다.

한국기자협회의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다시 읽어본다. ‘자살보도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릅니다.’ ‘자살보도 방식을 바꾸면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기사 쓰는 일이 너무나 버겁게만 느껴지는 요즘이다.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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