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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진주 사람들의 집요한 노력, 한 여자를 기억하려는

등록 2023-05-23 18:24수정 2023-05-24 02:38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왜장을 끌어안고 자살 투신한 논개의 공은 혁혁하다. 그러나 논개는 ‘관기’였다. 기생은 사농공상 네개의 계급으로 구성된 조선의 신분체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계급의 바깥, 계급조차 부여되지 않던 미천한 존재였다. 그 행위가 비록 의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지배계층으로선 비천한 한 여자를 공적 역사에 끼워 주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진주 논개제’가 열린 경남 진주시 진주성 아래 남강 의암에서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드는 순국 장면이 재연되고 있다. 연합뉴스
‘진주 논개제’가 열린 경남 진주시 진주성 아래 남강 의암에서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드는 순국 장면이 재연되고 있다. 연합뉴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5월의 진주는 한없이 화창하고 그윽하다. 신록으로 뒤덮인 진주성은 생기가 넘치고 수양버들은 우아하게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사람들을 맞는다. 논개를 기리는 축제 ‘논개제’는 그 5월의 사흘 동안 진주성에서 열린다.

논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건 유몽인의 책 <어우야담>이다. 유몽인은 논개가 죽은 해인 1593년 삼도순안어사가 돼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을 보필해 경상·전라·충청 지방을 두루 살펴본다. 한양은 수복됐지만 전쟁 중이었고, 후방을 둘러보며 민심을 보살피고 전쟁 중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건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이 당시 삼도순안어사의 역할이었다. 유몽인은 진주에 머물며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데 막상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것은 그로부터 28년 뒤인 1621년이 되어서다.

목격과 구전으로 시작된 논개의 죽음 ‘이야기’가 ‘역사적 기록’이 되자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포상을 조정에 청원한다. 조정에서는 어떤 포상도 내리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왜병 한명의 목만 베어도 공을 인정해 벼슬까지 내리던 당시 상황에 비춰 보면, 왜장을 끌어안고 자살 투신한 논개의 공은 혁혁하다. 그러나 논개는 ‘관기’였다. 기생은 사농공상 네개의 계급으로 구성된 조선의 신분체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계급의 바깥, 계급조차 부여되지 않던 미천한 존재였다. 그 행위가 비록 의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지배계층으로선 비천한 한 여자를 공적 역사에 끼워주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가 논개의 죽음을 외면하자 진주 사람들은 논개 포상을 공론화한다. 일개 ‘관기’였던 한 여자를 진주 사람들은 왜 이토록 ‘기억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주장했을까. 그들에게 논개는 잊지 못할, 또는 잊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이 분명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진주 사람들의 애정은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조정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논개에 관한 공식적 기록이 있은 지 100여년 세월이 흐른 뒤 최진한이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면서 논개 포상 논의는 다시 한번 급물살을 타며 수면 위로 떠오른다. 진주별장 윤상보 등 진주 사람들은 논개 포상을 건의하는 글을 최진한에게 제출한다.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공적이 임진왜란 때 전사한 사대부나 병사들 못지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진한은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비변사에 장계를 올리고 이 글을 검토한 비변사에서는 논개에게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당시의 왕 경종에게 올린다. 논개의 순국이 마침내 조정에서 정식으로 거론된 것이다. 논개가 죽은 지 129년 만의 일이었다.

왕의 명령으로 논개 포상을 논의한 조정은 논개의 죽음에 관해 명백하게 증거로 삼을 만한 전적을 제시하라고 명을 내렸다. 무리한 요구였다. 논개의 최후를 직접 목격했던 이들은 모두 죽고 기억과 이야기는 ‘공식적인’ 자료가 되지 못하니 논개 이야기는 증거 불충분으로 전설의 고향으로 가는 것이 남은 순서였다.

놀랍게도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죽음에 관한 공식적인 증거를 만드는 절차를 밟는다. 논개의 죽음을 기록한 비석을 건립한 것이다. 그들은 논개의 최후를 증명하는 비석을 세우고 그 비문을 조정에 제출한다. 비석을 세우기 위해 진주 사람들은 금품을 모으고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았다. 한 여자, 그것도 당시 세상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기생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진주 사람들의 열의는 눈물겹다. 정부는 논개의 자손을 찾아 특별히 부역을 면제해주고 상을 주도록 명을 내린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대응이었다. 논개에게 자손이 없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사이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했다. 관료 대신들도 바뀌었다. 진주 사람들은 다시 논개 포상 문제를 제기한다. 조정에 논개 사당을 내려주도록 글을 올린다. 100년 넘는 세월이 흐르고 노론이니 소론이니 집권세력이 바뀌어도 진주 사람들은 논개 포상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논개 포상을 청원하는 진주 사람들도 바뀌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했던 일을 손자가 이어받아 하는 셈이었지만 논개에 대한 진주 사람들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논개 영정. 진주시청 누리집
논개 영정. 진주시청 누리집

그리하여 논개가 죽은 지 147년 뒤(1740년) 조정은 마침내 논개의 죽음을 인정해 공식적인 상징물을 내린다. 진주성 안에 논개를 위한 사당을 세우게 된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미천한 신분의 기생 ‘사당’을 짓도록 한 것은 논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얼마나 많은 양반이 반대하고 얼마나 많은 남성 사대부가 인정하기를 거부했을는지는 논개 공적 논의가 시작된 시점부터 사당이 세워진 그 세월까지를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진주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논개를 기억하고자 했을까. 논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건 제2차 진주성 전투다. 임진왜란이 나던 그해 1차 진주성 싸움에서 크게 진 왜군은 다음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 호남으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임진년 진주성 전투의 패배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 사람들은 패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적이 본성을 짓밟아 평지를 만들었는데 성안에 죽은 자가 6만여명이었다. 성안에 쌓인 주검이 1천여구이고, 촉석루에서 남강 북안까지 쌓인 주검들이 서로 겹쳤으며, 청천강(남강)에서부터 옥봉리, 천오리까지 주검이 강 가득히 떠내려갔다 한다. 이곳에 논개가 있었다.

목격·기억·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성을 함락한 왜군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 곱게 단장하고 의암에 나타나 왜군의 관심을 끌고 그녀에게 다가온 한 장수와 함께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진주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인 듯하다.

2013년 9월30일 저녁 경남 진주시 남강변에 유등으로 만든 진주성 전투 모습이 눈길을 끌고 있다. 연합뉴스
2013년 9월30일 저녁 경남 진주시 남강변에 유등으로 만든 진주성 전투 모습이 눈길을 끌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것이 깜깜한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피비린내와 고통의 신음이 온 산천을 물들이려는 그 순간, 그녀는 한줄기 찰나의 희망으로 솟아났다 사라진다. 섬광처럼 잠깐 비치던,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리던 빛. 그날 이후 논개의 이름으로 진주 사람들은 물었던 듯하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누가 전쟁에 찬동했는가, 누가 전쟁을 막지 못했는가. 무도하고 무능하고 타락한 자들에 맞서 누가 싸웠는가. 논개의 이름으로 진주 사람들이 끝끝내 말하고자 했던 건 전쟁의 참혹함과 더불어 조선 사회가 지닌 모순, 계급과 성, 이었을 것이다.

531년 전 오늘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날이다. 1592년 5월23일 일본군 선발대가 700척의 배를 타고 부산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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