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토양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과학 발전은 인류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는 우리 모두 음미해볼 만한 지적이지만, 그 대안이란 게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막연한 향수에 불과하다면 그 또한 한계는 분명하지 않을까. 게티이미지뱅크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이번 학기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머물면서 참석한 학술행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클라크 강연’이었던 것 같다. 영국의 다른 대학들이 갖지 못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장점은, 제각기 전통과 자산과 학문공동체를 지닌 여러 칼리지의 연방 구조가 전체 대학교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칼리지 중심의 다양한 학술과 문화활동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기에 전공분야 밖에서도 심도 있는 토론에 참여할 기회가 많다. 그런 토론은 식사시간이나 다과실에서도 일어나지만, 클라크 강연처럼 꽤 중요한 공식 이벤트를 칼리지에서 주관하기도 한다.
1888년부터 일년에 한번씩 개최돼 온 이 행사는 세계적으로 꽤 유서 깊은 인문학 석학강연 중 하나다. 올해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이탈리아문학 교수 로버트 포그 해리슨이 2주 동안 트리니티 칼리지에 묵으면서 네차례 강의를 통해서 현대과학에 대한 비판론을 전개했다. 첫번째 강의에서 그는 최근에 제임스 웨브 천체 망원경에서 찍은 적외선 사진에 나타나는 수많은 외부 은하들을 보여주며 이를 ‘수상한 무한대’라고 칭했다. 즉, 우주에 대한 지식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늘어나는 지금 시대에 그런 과학적 발전의 진정성에 대해 그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1966년 달 근처에서 우주 탐사선이 보내온 지구의 이미지를 보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전개한 비관론을 인용하면서, 지금의 천체 물리학도 인간 삶의 가치와 관계없는 방향으로 흐른다고 암시했다. 강연 시리즈 전체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구 대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무한한 영감’이었다. 생명과 생태계의 기적, 강과 나무의 상호작용, 인간의 오감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여러 생화학적 현상에 집중하면서 지적 탐구의 인문적인 가치가 되살아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포함돼 있었다.
나중 대화에서 밝혀진 해리슨의 동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문과의 위기’, 혹은 문과와 이과 사이 갈등이었다. 미국 대학입학 전문회사 코펠만 그룹 통계에 의하면, 2020년 한해 동안 스탠퍼드대학은 해리슨의 전공인 이탈리아문학과에서 딱 한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와 비슷한 전통의 외국문학이라고 할 만한 스페인문학도 한명, 독문학은 두명을 졸업시켰다. 같은 해 스탠퍼드 컴퓨터과학 전공 졸업생은 300명 이상이었고 지난해에는 전체 졸업생 중 16%가 컴퓨터과학을 전공(복수전공 포함)했다고 한다.
해리슨 자신은 자연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비전문가로서 공부해온 지 오래라고 한다. 원자폭탄이나 화학무기 같은 파괴적인 발명, 혹은 정보과학의 난무에 대한 비판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보통은 큰 영감을 주는 대상으로 여겨지는 별과 은하와 우주의 탐구까지 수상하게 여기는 그의 시각은 다소 놀랍고 신선했다.
과학 발전에 대한 비관론에 과학자들 자신이 기여하는 바가 많음은 물론이다. 만사에 ‘정답’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적나라한 자신감은 물리, 화학, 생물, 의학 전역에 걸쳐서 일반인의 괴리감을 조장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과학의 오만을 순화시킬 잠재력을 지녔음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슨의 강연에서 공감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지속해서 표현된 ‘향수의 가치관’이었다. 그는 미학과 철학을 겸비한 시들의 낭송을 각 강의의 중요한 지점에 배치했다. 레오파르디, 로제티, 횔덜린, 릴케, 그리고 스티븐즈 등의 다양한 시를 통해서 이론적인 담론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직관을 청중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 문체와 문화 조류를 바탕으로 글을 쓴 이 시인들의 작품은 바로 향수의 핵심적인 역할을 공유한다. 이것은 ‘과학-기술 비판론’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추궁은 결국 ‘없어진 세상’에 대한 막연한 향수로 낙착되기 쉽기 때문이다.
향수는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에 약간의 슬픔을 곁들인 깊이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을 선도할 가치관의 원천으로서의 향수는 상당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이는 어쩌면 19세기와 20세기 유럽 낭만주의 역사의 중요한 교훈이다.) 가장 큰 약점은 향수의 대상이 사실은 모호하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자의 마음속의 ‘고향’은 실존한 일이 거의 없고 영원의 환영 속에 ‘전통’은 항상 재발명된다.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는 꿋꿋한 정신을 기반으로 인간의 영적인 가치를 되살리는 어려운 작업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공통으로 주어진 과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