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자들일수록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경우가 많다. 이들이 뻔뻔하게 활개치는 상황은 내버려둔 채, 우리만 자그마한 부도덕에도 전전긍긍하는 게 썩 공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상황은 도덕적 피로감을 가중하고 사회 전반에 윤리에 대한 냉소를 전염시킨다. 도덕적 불감증에 적절히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도덕적 피로감 역시 나쁜 쪽으로 변질하기 쉽다.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차별적 문화나 언어에 대한 문제제기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어난 것 같다. 드라마 <굿 플레이스> <더 오피스>의 프로듀서 마이클 슈어는 최근 펴낸 책에서 ‘윤리적 삶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피넛버터에 잼 바른 샌드위치 좋아하는구나? 맛있겠네. 그 이기적인 네 점심 메뉴 때문에 땅콩알레르기로 고통받고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어린이 1천만명은 상관없나 보네.” “기원전 340년에는 개인의 선택이 야생동물 생태계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을 아무도 몰랐다.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설사 모르는 게 있어도 어딘가에서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나 아주 친절하고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일깨워준다.”(<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262쪽)
슈어는 저런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도덕적 피로감’(Moral Exhaustion)이라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일상 속 행동, 말 한마디가 가지는 윤리적 의미를 주의 깊게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윤리적 딜레마를 발견할 확률이 높고 도덕적 피로감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어떤 행동을 해도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고민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한국에서 흔히 ‘피시’(PC·Political Correctness)라는 개념으로 불리는 태도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저런 것까지 고민해야 돼?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지 않았다. 몇년 전, ‘결정장애’라는 말을 왜 쓰면 안 되는지를 설명하는 책을 읽으며 내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물론 머리로는 왜 그게 장애인 차별적 표현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선 ‘쓰면 안 되는 표현들의 목록’을 끝도 없이 작성하는 일에 어딘가 좀 삐딱한 감정이 솟아났던 것 같다. ‘거참, 이러다가 무슨 말 한마디를 못 하겠네.’ 무심코 뱉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기업에 성희롱 예방교육이 하나둘 생겨나던 무렵 남자 부장님 및 이사님 단골 레퍼토리. 깨달은 순간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도덕적 피로감은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건전한 윤리감각을 품고 있음을 보이는 강력한 증거다. 슈어가 집요하게 도덕적 피로감을 언급하는 이유도 그것이 해롭거나 기피해야 할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직시하고 견뎌내야 할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도덕적 피로감에 시달리는 반면, 도덕적 피로감을 못 느끼거나 적극적으로 안 느끼는 자들이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자식의 입시비리 증거가 쏟아져 나오고 법적 판단까지 나온 다음에도 “내 딸 때문에 피해 본 사람 없다”고 주장하는 전직 장관도 있다.
남이야 피해를 보건 말건, 공동체가 무너지건 말건 제 이기심을 충족하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자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소위 말하는 성공한 자들일수록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경우가 많다. 이들이 뻔뻔하게 활개 치는 상황은 내버려둔 채, 우리만 자그마한 부도덕에도 전전긍긍하는 게 썩 공평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상황은 도덕적 피로감을 가중하고 사회 전반에 윤리에 대한 냉소를 전염시킨다. 도덕적 불감증에 적절히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도덕적 피로감 역시 나쁜 쪽으로 변질하기 쉽다.
그러므로 도덕적 불감증은 제재돼야 한다. 경제인류학자 새뮤얼 볼스와 허버트 긴티스에 따르면 인간은 ‘이타적 처벌자’다. 인간에게는 설령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배신자, 무임승차자를 기어코 처벌하려는 성향이 있다. 일종의 본능이다. 본능이라고 다 정당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에 그렇게 진화해왔다.
일상적 표현이나 대중문화에 도덕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는, 사회 정의의 문화적 기반이 될 수 있기에 바람직하다. 다만 한가지 준칙이 필요하다. ‘공평하게 관대하라.’ 우선 우리가 완벽하게 도덕적일 수 없다는 점을 겸허히 인정하자. 우리 부족이라고 눈감아주지 말고 상대 부족이라고 과도하게 가혹해선 안 된다. 사람마다 자원과 정보의 접근성이 다르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약자의 부도덕에는 더 관대하고 강자의 부도덕에는 더 엄격해야 한다. 잘 조절된 피로는 근육을 강화한다. 도덕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