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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6411의 목소리] 공연기획자의 공짜 노동은 당연한 것인가요?

등록 2023-06-21 19:03수정 2023-06-22 02:04

6411의 목소리

극단 세즈헤브 <세익스피어 소네트>가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 최샘이(왼쪽 셋째)씨는 기획자로서 현장사진이 없어, 단체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최샘이 제공
극단 세즈헤브 <세익스피어 소네트>가 끝나고 찍은 단체사진. 최샘이(왼쪽 셋째)씨는 기획자로서 현장사진이 없어, 단체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최샘이 제공

최샘이 | 독립기획자

공적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의 경우 공연이 올라가는 동안은 그나마 표준계약서와 고용보험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렇지만 계약에 포함되지 않는 기간도 일해야 한다. 공적 지원 이전 단계부터 회의와 지원서 작성 등 업무를 수행하느라 시간과 역량을 투입한다. 작품이 끝나고 난 뒤에는 공적 지원의 무사한 마무리를 위해 정산, 결과보고 등 업무를 한다. 하지만 그 기간 흘린 땀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안녕하세요, 공연 기획하는 최샘이입니다.’

자기소개하고 나면 ‘공연 기획은 뭘 하는 거지?’라는 눈빛을 받곤 한다. 그러게요, 기획자란 뭘까요? 배우가 연기하듯, 가수가 노래하듯, 기획자의 기획도 바로 “짜잔!”하고 보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공연기획자는 작품 개발부터 실연까지 제반을 마련하고, 관객의 접근성 확보를 위한 일을 담당한다. 그 안에는 자원을 마련하고, 분배하고, 작품홍보 마케팅, 티켓 관리, 그리고 정산까지 한다. 공연을 올리기 위한 모든 대외적인 일을 총괄하는 셈이다.

기획 단계부터 프로젝트 주제와 방향성을 창작자와 함께 논의하고, 관객과 사회에 끼칠 영향력을 뽑아낸다. 프로젝트의 시사와 서사를 발견하고,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쌓아가며 그 결과가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한다. 한국 사회에 산적한 적폐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해 관객들이 퀴즈를 푸는 형식의 <적폐탈출게임-권리장전2019원조적폐>, 코로나19 시기 처음으로 시도한 온라인 줌연극 <어느 (친일파)의 하루_권리장전2020친일탐구>, 지역+여성+청년+예술 키워드로 지역 연극탐방프로젝트 <좋아서 하는 기획 01. 안녕 전주, 안녕 페미니즘>, 비건이 디폴트인 세상을 경험하는 <A.SF_비거니즘의 세계> 등을 기획했다.

기획, 정말 재미있는 작업이다. 상상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기획자는 창작자이자 예술인이다. 하지만 공연예술계는 늘 자원이 부족하다. 100석 이하 소극장 티켓 수익만으로는 제작비 회수가 어렵다. 더욱이 텔레비전(TV)과 영화에 이어 인터넷망으로 영상콘텐츠를 소비하는 오티티(OTT) 등이 커지면서 산업으로서 공연예술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그 공백을 메우려 정부가 예술진흥을 위한 기금을 투입하고 있다.

기획자로서의 회의는 여기서 시작한다. 공적 지원은 가끔 우리의 의도와 갈피를 잃어버리게 한다. 지원 신청서를 쓰다 보면 심사기준이나 사업요건에 맞추느라 애초 기획의도를 수정하거나 우리의 꿈과 상상을 지원사업의 크기에 맞춘다. 지원사업을 딸 것인가, 우리의 가치를 밀고 나갈 것이냐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예술인 최샘이’는 말리지 않고 더 부채질하고 싶다. ‘기획자 최샘이’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건비를 생각하면서 공적 지원이라는 동아줄을 잡고 만다. 무서운 자기검열이 생긴다.

공적 지원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지원금을 받고 나면 기획업무에 행정이 추가된다. 대표적인 문화예술 지원시스템인 e나라도움과 국가문화예술지원시스템 사용법을 익히고, 지원금 정산 서식대로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예산 분배, 표준계약서, 고용보험, 원천세 및 간이지급 명세서, 상해보험 등 자료를 모아야 하고, 홈택스와 고용산재보험토탈서비스 사용법도 배워야 한다. 가장 큰 공포는 공적 자금을 잘못 쓰거나 실수라도 하면 다음 지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나의 실수로 단체가 피해를 볼 수 있다니 무섭다. 행정의 언어와 문법은 작품개발과 제작과정에서 기획의 역할을 위축시킨다.

보장되지 않는 고용기간도 문제다. 공적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의 경우 공연이 올라가는 동안은 그나마 표준계약서와 고용보험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렇지만 계약에 포함되지 않는 기간도 일해야 한다. 공적 지원 이전 단계부터 회의와 지원서 작성 등 업무를 수행하느라 시간과 역량을 투입한다. 작품이 끝나고 난 뒤에는 공적 지원의 무사한 마무리를 위해 정산, 결과보고 등 업무를 한다. 하지만 그 기간 흘린 땀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고용보장 없는 이 기간이 얼마나 길지, 얼마나 힘겨울지를 예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마음에 안 든다며 예술감독이나 대표가 한달 동안 대화를 거부한다거나, 전화 통화 도중에 화난다고 나오지 말라고 통보한다든가, 진행하던 프로젝트에서 모든 연락을 끊고 잠수타는 등 해고에 준하는 일들도 겪게 된다.

간혹 공연예술의 미덕으로 공동체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래,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부당한 처우는 그저 관계에 호소해야 할 때도 있다. 기획자는 그렇게 정리가 되어도 좋은 존재인가.

좋은 작품을 잘 전달하기 위해 아침부터 공연장 곳곳을 뛰어다니고, 퉁퉁 부은 다리와 땀내 가득한 몸으로 퇴근하고, 공연을 보고 나오는 관객 표정을 떠올리며 보람을 느끼는 나의 모습은 어느 현장에도 꿀리지 않는 ‘노동자’이다. 우리가 만드는 예술의 향기는 노동이라는 거름 위에 피어난다. 예술인들이 스스로 시스템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성찰해야 한다. 대표의 위치든, 고용인의 위치든 늘 예술노동의 의미를 상기했으면 한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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