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 사람들은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추모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2013년 5월 소안항일운동기념관 옆 공터에 ‘소안면희생자추모비’라는 비석을 세웠다. 추모비 제막식 때 완도경찰서장은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사과했다. 추모비에는 마을별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새겼다. 화해와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2003년 소안항일운동기념관 앞에 세워진 ‘소안항일운동기념탑’. 박찬승 제공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1988년 가을 어느 날, 한 노인이 두툼한 서류가방을 들고 동덕여대 사학과 이균영 교수를 찾아왔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 바로 옆의 섬, 소안도에 사는 김진택이라는 분이었다. 그는 서류가방에서 소안도 사람들의 항일운동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꺼내 놓았다. 서울과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 재판 판결문과 여러 신문에 실린 기사들이었다.
이균영 교수는 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유명한 소설가였지만, 이때는 사학자로서 일제강점기 신간회 운동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다. 김진택 선생은 이균영 교수에게 소안도의 항일운동에 관한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 교수가 써야 할 다른 글이 많다면서 쉽게 대답하지 않자, 김진택 선생은 한달에 두번씩 서울에 올라와 이 교수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 교수는 1989년 봄 결국 글을 쓰겠다고 승낙하고, 소안도에 가서 노인들을 만나 구술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이 교수는 이후 자료를 정리해 <사회와 사상> 1989년 9월호에 ‘해방의 땅, 소안도’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소안도의 항일운동을 처음 세상에 알린 글이었다. <문화방송>(MBC)은 이듬해 3월1일 ‘소안의 봄’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에 고무된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1990년 6월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하고, <소안항일운동사료집>도 발간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을 세웠다.
소안도 선착장의 소안도 표지석에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쓰여 있다. 1920년대 배달청년회를 잇는 오늘날의 소안배달청년회에서 세운 것이다. 박찬승 제공
소안도의 항일운동은 비밀결사운동(수의위친계와 일심단), 청년운동(배달청년회), 노농운동(노농대성회), 사상운동(살자회), 교육운동(소안학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다. 면 단위 항일운동으로서는 이례적인 경우였다. 소안도의 항일운동은 소안도 출신으로 경성의 서울청년회와 신간회 본부에서 활동하던 송내호(1895~1928)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지도됐다. 그가 활동하던 서울청년회는 민족적 성향이 강한 사회주의 운동단체였다. 소안도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100명 가까이 된다. 이 가운데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이는 현재 22명이다.
해방 이후 소안도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1945년 8월 해방의 날이 오자 완도군에도 다른 군과 마찬가지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구성됐다. 완도 건준은 우파 유지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건준은 해체되고, 그동안 항일운동을 해오던 좌파 쪽 인물들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소안도의 청장년층도 일부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미군이 완도에 들어오면서 인민위원회는 강제로 해산됐고, 이에 참여한 이들은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이후 완도의 좌파는 1947년 3·1절 기념집회, 5·1 메이데이 집회, 8·15 기념집회 등을 개최했으며, 1948년에는 남한 단독선거 반대를 위해 집회를 열거나, 전단 배포, 격문 부착 등의 활동을 했다. 1948년 5·10 선거를 전후해 경찰은 좌익세력 척결에 나섰고,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나고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좌익혐의자 체포는 더욱 가혹하게 진행됐다. 완도군의 소안도·약산도·금당도 등에서는 경찰이 좌익혐의자나 그들의 도피를 도운 이들을 체포해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북한의 도발로 전쟁이 시작되자, 군·경은 좌익이었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켰던 보도연맹(국민보호선도연맹)원들을 소집, 학살했다. 완도군에서는 200명 정도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데, 소안도에서는 19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다. 또 전남 나주의 경찰과 우익청년단으로 구성된 ‘나주부대’는 완도로 철수해 들어오면서 해남과 완도에서 인민군 행세를 해 ‘인민군 만세’를 유도한 뒤, 이에 호응해 만세를 부른 주민들을 사살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나주부대에 의해 사살된 이는 해남에서 55명, 완도에서 39명이었다. 완도 경찰도 여러 섬을 돌아다니면서 같은 행태를 반복했는데, 이로 인한 희생자는 30~40명가량 된다. 완도군 평일도 출신 임철우 작가가 이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 <그 섬에 가고 싶다>였다. 이후에도 경찰은 9월 중순까지 완도군을 지키면서,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좌익혐의자들을 찾아내 사살했다.
인민군은 9월14일 완도에 들어와 9월30일 철수했다. 인민군이 완도에 머무른 기간은 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 인민재판 등으로 9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인민군 후퇴기에는 30여명의 우익 인사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는 주로 경찰, 우익청년단, 면장 등 경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인민군이 철수하자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협조했던 이들은 대부분 육지로 피신했다. 일부는 장흥군 유치면 골짜기에 들어가 인민유격대(빨치산)가 되었는데, 군·경 토벌에 의해 대부분 사살됐다. 피신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 부역 혐의로 체포돼 즉결처형된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완도군에서 해방 이후 전쟁기까지 희생된 사람은 좌우익 합해 1천명 정도 된다. 이 가운데 소안면 사람들은 250명 정도다. 10여개 마을로 구성된 작은 면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소 냉전, 남북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된 것이다.
2013년 완도군, 소안면 희생자 유족, 소안면 출신 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소안면희생자추모비.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썼다. 박찬승 제공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소안도 희생자들을 조사한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권력의 사과를 권고했다. 이후 소안도 사람들은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추모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2013년 5월 소안항일운동기념관 옆 공터에 ‘소안면희생자추모비’라는 비석을 세웠다. 추모비 제막식 때 완도경찰서장은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사과했다. 추모비에는 마을별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새겼다. 지난해 경남 진주에 세워진 ‘6·25전쟁 진주민간인희생자 추모비’에도 좌우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새겨졌다. 화해와 치유가 시작된 것이다.
소안도의 추모비에는 “이곳은 용서와 화해로 승화한 평화의 마당이요, 후대의 거울이 될 역사의 교육장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달 25일은 전쟁 발발 73주년이요, 다음달 27일이면 정전 70주년이 된다. 이제는 우리가 ‘화해와 치유’를 통해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