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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아이의 썩어가는 발가락/박용현

등록 2006-03-21 18:17

박용현 기자
박용현 기자
아침햇발
김필연(51·여)씨는 10년 전 김천 소년교도소에 갔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소년범들을 위로하는 행사였다. “한 열 명쯤한테 물었는데, 엄마 있는 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 중 한 아이가 “선생님, 편지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15살에 수감돼 15년형을 살고 있는 아이였다. 거절할 수 없는 매달림이었다. 2년 전 청년이 되어 출소한 아이는 한 지방도시에서 공장일을 한다. “‘엄마’가 해처럼, 달처럼 지켜보고 있으니 나쁜 짓을 못하잖아요”라며 김씨를 웃음짓게 만든다. 김씨는 묻는다. “돌보지 않으면, 그런 아이들이 결국 유영철이처럼 되지 말란 법이 있겠어요?”

짓밟힌 새싹은 온전히 자라기 어렵다. 여린 탓이다. 때로 독을 품고 자라는 돌연변이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저 차이고 꺾이고 또 뭉개지고 만다.

미순(12·가명)이는 자주 집을 비우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날이면 이유없이 매를 맞았다. 어머니와 심장병을 앓는 동생은 말릴 힘이 없었다. 지난 겨울, 아버지가 돌아온 날 미순이는 도망쳤다. 하루종일 밖을 헤맨 아이는 동상에 걸렸다. 발가락이 벌겋게 까지고 검게 썩어드는데도, 아이는 온기 없는 방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오랜 결석을 걱정해 찾아온 담임 선생님은 아이의 모습에 울고 말았다.

세계야구클래식 4강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가난과 방임으로 위태위태한 아이들이 100만 명쯤 살고 있다. 아이들은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우성을 치지도 못한다. 그냥 그것이 삶인 줄 알고 언땅을 걷고 또 걸으며 헤맬 뿐이다.

인천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한 목사는 ‘6학년 선이’를 걱정한다. 여섯살 동생을 돌보는 것도, 아버지의 술주정을 받아주는 것도, 탈선한 중2 언니를 걱정하는 것도,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도 모두 선이의 몫이다. 그래서 가끔씩 “엄마처럼 도망가고 싶다”고 한다.

이 목사의 바람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두 명의 전문인력만 지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선이네처럼 어려운 가정에 찾아가 가사도 돕고 상담도 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세계 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정도의 복지 체계조차 가난한 목사의 꿈에 그치고 있다. 미순이네 동네에 그런 체계만 있었더라면, 아이의 발가락이 처참하게 썩어가지는 않았을 터다.

먼 훗날, 이 싹들이 끝내 꽃 피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순이를, 선이를, 낙오자라고, 왜 역경을 극복하지 못했느냐고 다그칠 것이다. 그 때도 여전히, 낙오자에게 복지를 베푸는 건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인 경쟁의 미덕을 해친다고 떠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이 아이들을 동등한 출발선에 세워준 적이 있던가. 풍족한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과 나란히, 날렵한 운동화를 신고 맘껏 달려보게 했던가.

아이들에게 경쟁의 조건도 갖춰주지 않은 채 살벌한 경쟁장으로 몰아대기만 하는 사회는 이미 발가락부터 썩어가고 있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독을 품고 자란 돌연변이가 또 나타나 세상을 증오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엄마’가 돼주지 않는다면.


“앞 전에 그렸던 하트 속의 아이들은 제가 이 세상에 남겨야 하는 슬픈 저의 흔적들입니다. … 제가 아이들에게 집착했던 건 아이들의 마음엔 상처가 깃들지 말았으면 해서였습니다. … 어느 누구들보다 아이들은 상처받으면 안 됩니다.”(사형수 유영철이 최근 조성애 수녀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에서)

박용현 기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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