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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고래야 잘했어!

등록 2023-08-13 18:39수정 2023-08-14 02:36

에드워드 번-존스,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 1880~84, 캔버스에 유채, 290×136㎝, 런던, 테이트갤러리.
에드워드 번-존스,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 1880~84, 캔버스에 유채, 290×136㎝, 런던, 테이트갤러리.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구마의 원래 이름은 단 뿌리라는 뜻의 감저(甘藷)인데, 이는 감자의 옛말이기도 하다. ‘감저’는 자기 이름을 지금의 감자에게 뺏긴 채, 고구마로 불린다. 영어에서도 ‘포테이토’는 본래 고구마였다가, 훗날 감자를 칭하게 됐다. 고구마가 감자보다 먼저 재배되기 시작했는데도, 마치 감자가 원류인 양, 사람들은 고구마에 달다는 ‘스위트’를 추가하여 ‘스위트포테이토’라는 이차적인 조어를 새로 붙여줬다. 감자가 고구마보다 수확량이 많아지고 식량으로써 식탁에서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고구마는 어느새 밀려나 버린 것이다.

원뜻을 밀어낸 말의 예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도 있다. 20년 전 우리 말로 출간된 외서의 제목인데, 국문 번역이 어찌나 머리에 잘 들어오는지 속담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게 되면서 이 문구는 책 내용에서 살짝 비껴가게 됐다. “우리 집 개도 예쁘다고 말해주면 시무룩하다가도 꼬리 치며 뛰어다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라는 식의 대화를 종종 듣는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상관없이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을 해주어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맥락에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와 비슷한 의미가 된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영어 원제는, ‘Whale Done! The Power of Positive Relationships’(고래야 잘했어! 긍정적 관계의 힘)이다. 이 책에 나오는 고래는 범고래로, 저자는 조련사가 범고래를 훈련시키는 비법을 관찰하다가 글감을 찾았다. 여기에서 칭찬은 능력과 위치가 동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하급자를 이끄는 상급자의 자질, 즉 리더십과 관련되어 있다. 언제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잘했어’하고 말해주는가?

이쯤 그림 하나를 소개할까 하는데,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왕조 영국의 화가, 에드워드 번-존스(1833~98)가 16세기에 유행하던 노랫말을 바탕으로 그린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이다. 왕과 거지는 신분의 차이에 있어 극과 극이다. 그림 속의 왕은 마치 신전에 온 것처럼 겸허히 왕관을 벗고 제단 위에 모셔진 듯 높은 곳에 앉은 소녀를 우러러본다. 이야기의 배경은 아프리카의 왕궁으로, 왕은 여자들에게 도통 마음이 끌리지 않아 결혼을 미루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문을 통해 궁전 밖을 내다보다가 한 거지 소녀가 지나가는 것을 운명적으로 보게 되는데…

스치듯 본 그 순간에 이미 강렬한 감정에 빠져든 왕은 이 여인과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선언한 뒤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길에 동전을 놓아두고 거지 소녀가 그것을 하나씩 주우면서 한 걸음씩 다가오게 유인했다. 마침내 왕의 발밑 동전에 손을 뻗치자, ‘당신은 내가 발견한 진흙 속의 진주야!’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청혼했다. 거지 소녀는 왕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고,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우아하고 자비로운 왕비로 변하여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번존스가 이 그림을 그리던 무렵, 영국에서는 보잘것없는 하류층 여자를 교화시켜 귀부인급으로 만든 뒤 아내로 맞는다는 내용의 대중 소설이 흔했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항간에 돌아다니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피그말리온’(1913)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썼다. 우리에게는 배우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의 원작으로 더 잘 알려진 연극 대본이다. 어느 언어학 교수가 길거리의 일자무식 꽃 파는 소녀를 집에 데리고 가서 정통 영국식 발음에서부터 매너에 이르기까지 전부 가르친 뒤 완벽한 상류층 여인으로 바꾼다. “지금 당신이 어떤 줄 알아? 최고야!” 자신의 교육으로 거듭난 여인에게 던진 언어학자의 이 말은 바로, 자기가 만든 걸작품과 사랑에 빠진 고대 그리스 조각가 피그말리온의 만족이었다.

‘잘했다’는 말은 성과에 대한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내가 너를 앞으로 관심 있게 지켜보겠으니 그 일에 더 매진해보라는 기대가 배후에 깔려 있다. 그 기대가 복합적인 효과를 내어 자기 재능을 발견하게 하기도 하고,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일의 보람과 삶의 즐거움을 찾게 해주기도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애초에는 상급자의 명민한 조련술과 관련되어 있었겠지만, 어느새 원뜻이 슬며시 변해 있다. 살면서 서로 격려의 말을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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