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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석기의 과학풍경] 오펜하이머와 방사능 멧돼지

등록 2023-09-12 19:30수정 2023-09-13 02:36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주에서 사냥한 멧돼지의 시료 대부분에서 허용치를 넘는 방사성핵종 세슘137이 검출됐다. 동위원소 비율로 추측한 결과 평균 25%는 지상 핵무기 실험에서 기원했고(왼쪽) 75%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 나왔다(가운데). 오늘날 대기 중 세슘137은 무시할 수준이지만 땅속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특히 멧돼지의 먹이인 버섯에 농축돼 있다(오른쪽). ‘환경 과학 및 기술’ 제공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주에서 사냥한 멧돼지의 시료 대부분에서 허용치를 넘는 방사성핵종 세슘137이 검출됐다. 동위원소 비율로 추측한 결과 평균 25%는 지상 핵무기 실험에서 기원했고(왼쪽) 75%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 나왔다(가운데). 오늘날 대기 중 세슘137은 무시할 수준이지만 땅속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특히 멧돼지의 먹이인 버섯에 농축돼 있다(오른쪽). ‘환경 과학 및 기술’ 제공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지난주 영화 ‘오펜하이머’를 봤다. 원자폭탄 개발을 목표로 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어 성공시켰지만 사상 문제로 퇴출당한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실감 나게 그렸다. 영화에서 미국 뉴멕시코주의 황량한 고원인 로스앨러모스에 연구소를 짓는 장면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그동안 책으로만 알고 있었던 원자폭탄 연구의 산실이 이런 곳이었구나 하며 감탄하면서 봤다. 백미는 영화가 시작하고 거의 두시간이 지났을 때 나온 원자폭탄 폭발 실험 장면이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고 제로가 되는 순간 엄청난 섬광이 스크린을 채웠다. 동시에 소리가 사라지며 폭발을 지켜보던 과학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비췄다. 이렇게 1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당시 과학자들 다수는 폭발 지점에서 32㎞ 떨어져 지켜봤는데, 빛의 속도는 너무 빨라 사실상 폭발 시점에 섬광이 보이지만 폭발음은 음파의 속도이므로 약 1분30초 뒤에나 도달한다. 번개가 번쩍하고 수초 뒤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이 장면의 디테일을 음미하기 바란다.

1945년 7월16일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을 거두고 일본에 실전 투하돼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확인된 뒤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 몇몇 나라가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고 방사성핵종 오염 문제로 금지될 때까지 무려 500여차례나 지상에서 핵무기 실험이 행해졌다. 방사능 수치가 가장 높았던 1960년대 중반 이후 6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대기에서 거의 검출되지 않지만, 육지에는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난달 학술지 ‘환경 과학 및 기술’은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주 곳곳에서 사냥한 멧돼지 시료 47개의 세슘137의 방사능 수치가 370~1만5천베크렐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47개 시료 가운데 88%가 유럽의 허용 기준인 600베크렐보다 높았다. 한국과 일본의 허용 기준인 100베크렐로 보면 전부 한참 넘어 3.7~150배 수준이다.

바이에른주 동쪽 국경은 1986년 원전 폭발이 일어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불과 1300㎞ 떨어진 거리이고 따라서 시료에 들어 있는 세슘137의 평균 75%가 체르노빌 기원이다. 핵무기 폭발 실험에서 온 건 25%에 불과하지만, 폭발 실험 대다수가 반세기 전 오지에서 진행된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세슘137의 반감기는 약 30년으로 핵무기 실험으로 생긴 세슘137의 총량은 지금 대략 4분의 1로 줄었을 것이고 그나마 땅 밑으로 흘러들어갔을 텐데 어떻게 멧돼지의 몸에 여전히 높은 수준으로 존재할까. 세슘은 양이온 상태로 존재해 흙 표면의 미네랄에 흡착해 머물러 지하로 내려가는 속도가 느리다. 그리고 땅속에서 자라는 버섯이 세슘을 흡수한다. 겨울철 먹을 게 부족해진 멧돼지는 예민한 후각으로 냄새를 맡고 땅을 파헤쳐 버섯을 먹고 그 결과 체내에 세슘137이 농축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일이 뜻대로 안 풀릴 때면 핵무기를 쓰겠다는 협박을 하곤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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