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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방송 예능국에는 웃음소리가 없다

등록 2023-09-17 19:05수정 2023-09-18 02:42

[6411의 목소리]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2017년 11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작가도 노동자임을 강조하는 큐시트를 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2017년 11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작가도 노동자임을 강조하는 큐시트를 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원(가명) | 15년차 예능작가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하고, 내일은 1시에 뵙죠.” 메인 피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트북 모니터 속 시계를 보니 밤 11시.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내일 1시에 보자고 했으니 그때까지 남은 14시간 동안 다시 회의를 위한 자료를 조사하고 섭외 대상 목록을 만들고 프로그램 구성 아이디어도 생각해야 한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지금까지 14시간을 일한 나는 후배 작가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메신저로 하자”고 한 뒤 방송국을 나선다. 오늘도 잠은 편히 자기 글렀다.

나는 15년차 예능방송작가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니, 예능작가 15년이면 예능감이 웬만한 개그맨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오히려 언제 웃었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유독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나는 대학 4학년 때 호기롭게 방송아카데미에 등록했고, 6개월 뒤 경기 일산 문화방송(MBC) 예능국의 막내 작가가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팀 내 서열 두번째 작가가 되었지만 하는 일은 막내일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적게는 예닐곱, 많게는 십수명으로 꾸려지는 팀에서 작가들이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일이다. 최근 트렌드를 익히기 위해 쉼 없이 인터넷을 검색하고 타 프로그램 모니터를 한 뒤, 출연자가 정해지면 사전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문서화해 자료로 준비하면 끝없는 회의가 시작되고, 그날의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또 다음 회의 일정이 잡힌다.

예능은 프로그램 시작까지 준비해야 할 것도 많지만,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면 할 일은 더 많아진다. 여전히 계속되는 회의와 출연자 미팅, 대면 인터뷰와 전화 섭외가 수시로 이루어지고, 촬영 장소 섭외까지도 작가들이 담당할 때가 많으므로 손에서 전화기 놓을 새가 없다. 오죽하면 샤워실에도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갈까. 이렇게 주 5일 이상을 밤낮없이 빙송국에 상주하며 일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예능 프로그램의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프로그램의 분량과 녹화 시간도 늘어났다. 80분짜리 방송을 위해 10시간 넘게 녹화하고, 오디션 프로그램 한회를 녹화하기 위해 사전 녹화와 리허설 등 며칠에 걸려 진행하기도 하고, 여행이나 관찰 예능인 경우는 열흘에서 보름 동안을 카메라를 끄지 않고 녹화를 한다. 프로그램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예능 프로그램 특성상 출연자를 필수로 관리해야 하므로 모든 촬영지에는 작가가 있어야 하고, 녹화 수시간 전부터 대기하는 것은 물론 녹화가 끝나면 현장 정리 뒤 퇴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사이에 잠은 물론 ‘못’ 잔다.

어떤 프로그램은 자막도 작가의 몫이라 녹화와 자막 쓰는 날이 이어지면 2박3일은 아예 잠은 포기해야 한다. 생각보다 자막 쓰는 일이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80분 프로그램의 경우 여러 작가가 나눠서 자막을 써도 꼬박 15시간 이상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생 끝에 방송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통상 짧게는 서너달, 길게는 6개월이 넘는 기획 기간 도중에 프로그램이 무산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방송이 송출되어야만 작가료가 지급되는 현실에서 기획 준비를 아무리 오랜 기간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도 돈은 한푼도 받지 못한다. 그나마 요즘은 과거에 비해 사정이 좀 나아져서 계약서도 작성하고 고용보험 가입도 가능해졌다지만, 그 또한 방송 편성 확정을 받은 뒤에 이뤄지기 때문에 이전 기획 기간에 대한 노동은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늘 불안을 안고 일한다. ‘방송될 수 있겠지?’ 하고.

가끔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불안함 없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긴 올까. 사람들은 카메라 뒤에 몸을 숙인 채 소리 없이 일하고 있는 방송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까.

세상의 많은 방송작가들이 그러하겠지만, 우리는 그리고 나는 요즘처럼 불신과 혐오가 넘쳐나는 시대를 품어줄 수 있는 건 미디어의 힘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따뜻하고 재미있는 것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방송을 만든다. 그리고 그 방송을 보고 웃는 사람들을 보면 더없는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순수한 열정을 방송국은 너무도 함부로 갖다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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