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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피엔스다운 머리 쓰기

등록 2023-09-20 18:59수정 2023-09-21 02:36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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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전화번호를 몇개나 기억하나요? 수백명이 모인 강연 자리에서 필자가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청중 대부분은 두세개 정도를 외우고 있다. 휴대전화에 수천개 전화번호가 저장되는데, 굳이 내가 애써 외울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최소 대여섯개 이상 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이제 일정, 업무관련 문서, 참고자료 등도 모두 휴대폰에 저장해서 언제든지 열어본다. 휴대전화가 거대한 기억장치가 된 셈이다.

얼마 전 태풍이 몰아치던 날, 필자는 차를 몰고 한 강연장으로 향했다. 태풍의 영향인지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돼버렸다. 도착지까지 3킬로미터를 남긴 상황이었다. 목적지가 코앞인데도 내비게이션이 없으니 길을 찾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강연 시작 2분 전에야 도착했다. 필자가 첫차를 구매했을 때, 자동차 영업소에서 두툼한 지도책을 끼워줬다. 어딘가를 가려면, 지도를 미리 펼쳐놓고 머릿속으로 큰길을 그려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비게이션으로 눈앞의 안내만 받다 보니, 큰길이 머릿속에 잘 안 그려진다. 길 찾기 능력이 퇴화한 느낌이다. 이런 상황은 실험을 통해 증명되기도 했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한 피실험자들은 지도를 보고 길을 잘 찾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같은 디지털 기기를 쓸수록 내 머리가 나빠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2022년 인도 연구진은 2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스마트폰을 많이 쓰는 이들에게서 건망증과 산만함이 증가하고, 판단력이 저하된다고 보고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 도구의 활용이 증가하고 있는데, 또 다른 측면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스탠퍼드대학이 재학생을 대상으로 시행한 조사를 보면, 4천명 넘는 응답자 중에서 5%는 인공지능 도구가 제시한 결과물을 과제나 시험에서 별도의 편집 없이 그대로 제출했다고 답했다. 전화번호 암기나 길 찾기 정도가 아니라, 복잡한 사고까지 디지털 기술에 의존해 가며, 사피엔스의 머리가 점점 더 굳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

디지털 기술에 의지해 머리를 안 쓸지, 아니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머리를 더 쓸지는 우리가 결정할 몫이다. 그래서 필자는 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더 쓰기를 제안한다. 인간 뇌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이중 프로세스 이론이 있다. 인간이 두 가지 정보처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시스템 1은 직감적, 감각적, 자동으로 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한다. 시스템 2는 규칙에 기반을 두어 통제적, 논리적, 분석적으로 정보를 처리한다. 둘 다 중요한 몫을 하지만, 인류가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배경에는 시스템 2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시스템 2의 머리 쓰기에 도움을 받자고 제안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 머릿속 시스템 2를 멈춰서는 안 된다. 시스템 2가 하던 역할 중에서도 기본적, 반복적, 덜 가치 있는 머리 쓰기를 디지털 기술에 맡기자. 우리의 시스템 2로는 더 가치 있는 머리 쓰기에 집중하자. 그런데 더 가치 있는 머리 쓰기란 무엇일까? 무엇에 머리를 써야 가치 있을까?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을 스마트폰이나 인공지능 챗봇에 묻지는 말자. 이 질문에 관한 대답부터 우리의 시스템 2로 해결해 보자. 그게 우리의 역할이다. 우리가 명색이 사피엔스인데, 머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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