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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6411의 목소리] 휴일 없는 노동, 가사노동자의 삶

등록 2023-09-24 18:25수정 2023-09-25 02:35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고 신선한 먹거리를 찾기 위해 꾸준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필자 제공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고 신선한 먹거리를 찾기 위해 꾸준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필자 제공

김동건 | 전업주부

5시20분. 알람이 울릴 시간은 10분 정도 남았는데 절로 눈이 떠진다. 주방으로 나가 남은 밥을 살피고 4인분 쌀을 씻는다. 언제나 같은 하루의 시작이다. 밥을 안치고, 출근하는 아내가 가지고 갈 과일을 식초물에 담가 씻고, 도시락 반찬을 담고, 수저통을 챙긴다. 보온병에 따뜻한 물도 담아줘야 한다. 삐이, 밥솥에서 울리는 취사 완료음. 도시락에 밥을 담고, 찻물을 끓인다.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6시40~50분. 아내와 아이를 깨운다. 씻고 나온 아이 차림새를 살펴주고 간단하게나마 아침 식사를 챙긴다. 아내에겐 모닝커피도 함께. 자질구레한 아침시간이 계속된다.

8시30분. 모두 보내고 조용해진 집 안. 휴대폰에 메모해 둔 ‘오늘 처리할 일들’을 다시 점검하며 아침을 먹는다. 싱크대 가득 쌓여 있는 설거지가 눈에 거슬린다.

10년 전, 급격히 악화한 건강 때문에 30년 직장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내가 은퇴하는 날이 오면 아내가 사회활동을, 내가 살림을 하기로 미리 정해두었기에 그저 덤덤했다. 결혼 전 자취 생활도 오래 했기에 가사노동에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까짓 집안일쯤 간단히 해치우고, 남은 시간은 조용히 음악 들으며 책 읽는 여유로운 생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1+3=4가 아니다. 자취할 때보다 사람은 셋 늘었을 뿐인데, 노동 강도는 10배, 20배 이상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음식 준비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다. 식구 각각의 건강과 취향을 모두 고려해 식단을 짜고, 때맞춰 식재료를 사야 한다. 설거지는 수시로 해야 했고, 화장실 세면대는 왜 그리 쉽게 지저분해지는지. 매일 가족들 옷을 살피고 위생도 책임져야 했다. 세금 및 관리비 처리, 가전제품 수리 점검, 아이 과제물 준비, 쓰레기 처리에 옷 정리….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챙겨야 할 것들이 있었다. 어디 가족뿐이랴. 친척, 이웃, 주거환경, 가재도구까지 내 손을 필요로 하는 곳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2019년 통계청 발표를 보면, 무급 가사노동은 가정관리, 가족 및 가구원 돌보기, 자원봉사 및 참여활동, 이동 등 크게 네가지로 나뉘고, 이를 좀 더 구체화한 61개 항목으로 분류된다. 다른 어느 직종이 이렇게 많은 임무를 홀로 짊어질까. 그럼에도 주부가 담당할 몫은 갈수록 늘어가는 느낌이다. 점차 세분화하는 재활용쓰레기 배출 방법, 음식물 쓰레기 분류, 교육정책 변화, 정부보조금 신청 방법, 자질구레한 행정절차 등…. 새로 익혀야 할 것도, 준비해야 할 것도 찾아야 한다. 정말 가사노동의 세계는 넓고 끝없다.

가사노동에는 ‘끝맺음’이 없다. 아침 식사를 하면 점심이 기다리고 있다, 빨랫거리는 끝없이 나온다. 하나의 과정이 계속 반복되니 휴일도 없다. 일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다. 온 가족이 집에 있어 더욱 손이 많이 가는 날일 뿐이다. 육체가 잠시 휴식하는 동안도 정신은 쉴 수 없다. 간식 시간을 판단해야 하고, 아이들의 휴대폰 사용빈도도 제한해야 한다. 일이 생각만큼 되지 않는지 한숨을 내쉬는 아내의 표정도 살펴야 한다. 아이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을 돌보는 돌봄노동은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극한의 감정노동이다. 순간마다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 결과는 수시로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동료들과 술 한잔 나누며 떠들던 뒷담화의 시간이 주부에겐 없다.

게다가 가사노동에서는 좀처럼 보람을 느낄 수 없다. ‘가사노동’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이론상으로는 가치를 인정한다지만, 실상은 ‘경력단절’의 시간으로 여긴다.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니 무슨 보람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제 가사노동도 가치 있는 하나의 노동이라고 인식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사노동자들 스스로가 자기 활동에 자부심을 갖게 되기를. 통계청은 일상 속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가 대한민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5.5%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법원이 인정하는 전업주부 일당은 도시 일용직 건설노동자 일당에 준하므로, 2022년 기준 15만3671원, 월 383만원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정도로 사회적 공헌도를 지녔다면 가사노동자들은 이제 온전한 경제주체 중 하나로 인정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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