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각)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악수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정의길 ㅣ국제부 선임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9년 4월24일 러시아를 찾았다. 베트남 하노이의 북-미 정상회담을 노딜로 끝내고 회담장인 메트로폴 호텔을 떠난지 두 달 만이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떠난 김 위원장은 오후 6시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해 러시아 언론에 기습적으로 인터뷰를 당했다. 당황했는지 “저, 저…”라는 신음성 소리를 냈다. 러시아는 북한의 ‘존엄’을 존엄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북한은 자신들의 관례대로 전날에야 김 위원장의 방러를 발표했지만, 러시아는 이미 6일 전에 발표했다. 러시아는 러시아어로 “러시아-북조선 회담”이라고 표기했다. 미국과 대화가 결렬돼 러시아를 찾은 김 위원장에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는 북-미 대화를 지지하고, 6자회담을 열어 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양국 군사협력을 언급하지 않았다. 고립무원의 북한이 러시아를 찾아 손을 내밀었지만, “조-로 관계에서 새로운 전성기가 펼쳐졌다”는 말잔치뿐이었다. 그해 말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북한의 대외관계는 전면 동결됐다.
4년5개월이 흐른 뒤인 지난 12일 김 위원장은 다시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는 이번에는 북한과 동시에 전날에야 그의 방문을 공식 발표했다. 정상회담에서 늦게 나타나기로 악명 높은 푸틴은 13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 30분 일찍 도착해, 그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러시아-조선 회담”이라고 표기했다. 2019년엔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북한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를 인정하고 한국을 무시했다.
‘존엄’이 상처받던 ‘을’이던 김 위원장은 4년5개월이 흐른 뒤 ‘갑’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미-중 대결의 격화, 우크라이나 전쟁,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준동맹체제의 진전에 대응해 중-러와 북한이 만든 정세 변화다.
김 위원장의 을에서 갑으로의 격상은 미국의 반응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은 김 위원장의 방러를 지난 4일에 뉴욕타임스 보도를 통해 누설하고는 북한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포탄 등을 제공하는 무기 거래를 할 것이라고 양국 때리기에 나섰다.
하지만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이 지난 16일 “북한의 무기 제공이 우크라이나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내겠느냐”며 “나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듯이, 북한 재래식 재고무기의 지원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다. 북-러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의 전략관계 재개를 시사했다. 양국의 전략관계 재개는 양국을 넘어 동아시아, 미국의 세계전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푸틴은 지난 13일 김 위원장과의 회담 전에 ‘러시아가 북한의 우주 위성을 건설하는 것을 도울 것인가’라는 기자들의 물음에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라고 답했다. 러시아는 2015년 4월 김 위원장의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한 현영철 당시 인민무력부장이 방공미사일 시스템 S300의 구매와 원자력잠수함 설계 지원을 요청했지만, 명시적으로 거절한 바 있다. 하노이 노딜 이후 ‘핵무력 고도화’로 질주해온 북한에 러시아가 정찰위성 등 전략무기 기술을 지원하며, 북한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러시아와 북한의 경제협력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무력화한다. 2022년 북한 대외무역에서 중국은 96.7%, 러시아는 0.1% 미만을 차지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서방의 제재로 서방 경제와 절연된 러시아는 이제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주저할 이유가 없어졌다. 제재에도 불구하고 유가 상승과 중국과의 위안-루블화 거래로 새로운 경제생태계를 구축하려는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노동력을 북한으로부터 조달할 수 있다. 석유와 식량도 남아돌고 있다.
물론 군사 및 경제에서 북-러의 전략관계 심화는 아직 실현성 높은 가능성일 뿐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그 가능성을 카드로 휘두르고 있다. 김 위원장의 방러 때 푸틴의 방중과 중-러 정상회담이 발표됐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로 가던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미국이 몰타에서 붙잡고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의 회담을 급조했다. 그리고 조 바이든-시진핑 정상회담을 조율했다. 김 위원장의 방러가 미·중·러 삼각관계에 준 충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북-러의 전략관계에 놀란 미국이 중국에 다가서고, 중국은 북한과 결속하려는 러시아와의 연대 카드를 미국에 흔들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 카드로 미국을 자극하는 한편, 중국도 견인하려 한다. 북한은 이제 미·중·러 삼각관계를 요동치게 하는 독립변수로 등장했다.
하지만 한국과 윤석열 정부는 아직도 북한을 4년 전의 왕따당한 ‘을’로 보고 있다.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