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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가 되는 경험

등록 2023-10-04 18:56수정 2023-10-05 02:35

정연두 작가의 2023년 영상작업 ‘세대 초상’ 중 부녀의 스틸 사진.
정연두 작가의 2023년 영상작업 ‘세대 초상’ 중 부녀의 스틸 사진.

[크리틱]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대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길 바랐다. 음력으로 한해 중간인 8월 보름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청명한 날씨에 연중 달이 가장 크게 보이는 밝은 날이라 무엇을 해도 좋은 축제일이었다. 햅쌀로 떡과 술을 빚고, 새 옷을 입고, 놀이를 즐겼던 풍속의 기록은 고대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더없이 좋은 날이라 조상도 섬긴 날이었는데, 의례가 즐거운 풍속을 압도하며 부담스럽거나 고달픈 날이 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올해도 고향을 찾고, 가족을 만나 추석을 지냈다. 때마다 공동체적 정체성을 실감하게 된다.

제아무리 개별적인 정체성도 집단 안에서는 용해되고 마는 걸까, 마침 정연두 작가의 전시 ‘백년 여행기’를 보며 집단과 개인의 관계성에 대해 질문하게 됐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꿈이나 기억을 포착해 온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연례 기획에 올해의 작가로 초대되며 멕시코에 사는 한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한인 이주라는 서사 속에서 이들은 집단으로 역사성을 갖는다.

그중 ‘세대 초상’은 태평양을 건너 이국에 뿌리내린 한인 후손 여섯가구의 초상을 영상에 담은 작품이다. 부모와 자식을 5m 높이 스크린 2개에 각각 담아 전시장 양쪽 벽에 따로 설치했다. 서로를 마주 보는 왼편의 자녀와 오른편의 부 또는 모의 초상을 번갈아 볼수록 혈연관계의 닮은 구석이 흥미로운 동시에 그들의 사적 관계 사이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동선으로 관객은 난처해진다. 게다가 작품 한가운데서 낯선 그들과 묘하게 ‘우리’로 엮여버린다.

‘세대 초상’에서 한인 3세 남성의 딸로 등장하는 마리아 에우헤니아 올센 아길라르씨는 세대를 거치며 마야, 러시아, 노르웨이, 스페인 핏줄이 섞여 이미 한국인의 특징을 찾기 어렵지만, 한복을 입고 소고춤을 추며 등장한다. 그녀의 할머니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1907~1995)씨는 “경을 칠 혼혈아”라는 말을 듣고 자란 한인 2세였다. 돌도 되기 전에 마야인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한인 가정에 수양딸로 들어가 농장에서 고된 일을 하며 자랐다. 15세에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구박받다 일곱번째 남편을 만나 자식을 봤다.

고된 인생사는 사적이지만, 그 배경은 역사적이다. 한인들의 멕시코 이민사는 20세기 초 제국주의 무역과 식민지 건설에서 비롯됐다. 마리아 할머니의 아버지도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 일본의 대륙식민합자회사가 모집한 한인 노동자 1033명 중 한명으로 멕시코행 배를 탔다. 계약 노동이었지만, “불같이 뜨거운 가시밭에서 채찍을 맞아가면서 일을 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계약 내용은 지켜지지 않았다. 불볕더위에 가시 선인장인 에네켄을 수확하는 농장 환경은 혹독했지만,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주 노동자들은 현지 문화에 동화됐다.

‘세대 초상’에 등장하는 12명은 그 후손들로, 나이는 10대에서 90대로 다양하지만 저마다의 사연 속에 무의식 깊이 새겨진 한국인의 정체성을 표출한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된 모녀는 생업으로 여전히 한복을 짓고, 젊은 여성은 한국에서 배운 기술로 네일아티스트가 돼 인연을 이어간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멕시코인으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의 단면에서 발견되는 공동체적 정체성이 끈질기다 싶다. 미술관에서 작품과 관객으로 만났지만, 실제 역사의 시간 앞에서 ‘우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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