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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집안일은 명상이다

등록 2023-10-08 19:22수정 2023-10-09 02:06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며칠 전에 주문한 조립식 철제 수납장이 도착했다. 생각보다 부품이 많았다. 성급하게 접근하면 나사가 휘어지거나 잘못 조립하다 얇은 철판이 찌그러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어렸을 적 과학 상자나 레고 조립하듯이 놀이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방 청소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가정교사인 메리 포핀스가 ‘모든 일에는 재미있는 요소가 있어’라고 말한다. 재미를 많이 발견하는 것이 풍요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 신기하게도 한 면 한 면 이어 붙이니 형체가 생겨나고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고 존재의 의미가 생겨났다. ​너저분하게 널려있던 조각들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같았는데, 철제 수납장이 형태를 드러내면서 마음도 정리되는 느낌이다. 분명 몰입했고 수수께끼 풀듯 퍼즐을 맞추며 해답을 찾아갔다. 명상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가 완성되고 나니, 수납장을 둘 공간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빨래, 걸레질, 분리수거까지 집안일이 레고 블록처럼 연결되고 확장되었다. 그리고 가구와 조명도 재배치했다. 아무리 크고 무거운 가구라도 무게중심과 마찰력을 잘 활용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이동시킬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집안일은 창의적인 스포츠이다. 산책이 좋은 이유는 낯선 환경을 접하며 분위기 환기를 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가구나 조명의 이동만으로 집안에서도 낯선 환경을 연출해서 산책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집안일은 새로운 산책길을 내는 것이다.

어디선가 방 정리 상태가 머릿속의 무의식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청소를 하자. 창문을 활짝 열고 쾌청한 공기와 하이파이브를 하자. 집 자체도 분명 호흡을 할 것이다. 정리를 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비울수록 마음이 평온해지고, 내 집 평수가 커진다는 것을.

​부정적인 생각을 뒤집어 긍정적인 생각으로 재배치하고, 일어나지도 않을 불안이나 걱정, 욕심을 버려 마음의 평수를 키우면 우리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가끔씩 도망치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옷장같이 어두운 곳으로 숨고 싶을 때가 있다. 아마도 가장 평온했던 어머니의 양수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작은 올챙이 시절, 어머니의 양수는 하나의 우주처럼 컸으리라. 비울수록 평온하다. 집은 비우는 데 한계가 있겠지만 마음은 왠지 공(空)이 될 때까지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술버릇 중 하나는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집 정리를 하고 자는 것이다. 아니, 일부러 습관을 들였다. 술 마실 때는 안주를 많이 먹게 되어 그냥 자면 부대낀다. 그렇다고 취한 와중에 운동을 하기도 그래서 가벼운 산책 같은 기분으로 집 청소를 한다. 한번은 완전만취 상태로 들어와서 거의 대청소 수준으로 집안 정리에 가구 배치까지 바꾸고 잠들었는데, 다음날 ‘우렁각시’가 집을 청소해 준 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렁각시’가 아니라 ‘우렁나’였다. 아무튼 숙취가 있더라도 다음날 잘 정돈된 집을 보면 새 하루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집에서 영화 보며 캔맥주라도 마신 날에는 꼭 정리를 하고 맥주캔까지 분리수거하고 잔다. 전날 술 마셨던 잔상을 남기기 싫어서이다. 아침에 찌그러진 캔이 보이면 내 무의식이 ‘아! 어제 나 술 마셨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작스럽게 숙취 모드가 발동될 수도 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물론 안 좋은 기억들을 떨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트라우마나 흔적들도 잘 정리해두면 안전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집안일은 운동이다. 몸도, 머리도 많이 쓰게 되고 몰입도 하게 되어 자립하고 확장하고 성장할 수 있는 근력을 키워준다. 집안일은 음악이다. 집안일을 하는 동안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다. 모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다. 나는 지휘자이자 단원으로서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없이 오롯이 나만의 심포니를 만들어간다. 음표들을 시간 위에 차곡차곡 쌓기 위해서는 음표들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연주를 하다 지치면 악보에 쉼표 대신 고소한 커피를 그려 넣는다.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성찰의 시간을 통해 한 악장, 한 악장 만들어 가다 보면 새로운 공간이 완성되고 정리의 리듬감이 생긴다. 리듬감은 삶의 활력을 준다. 집안일을 잘하면 음악도 잘하게 될 것 같다.

​집안일은 아름다운 도피처이기도 하다. 시험이나 마감 날짜가 다가오면 청소나 집안일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집안일은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실마리이다. 뭔가 해답이 보이지 않고 마음이 답답할 때 체스를 두듯 집안일을 시작하자. ​집안일은 움직이는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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