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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6411의 목소리]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등록 2023-10-08 19:25수정 2023-10-09 02:07

번역은 옮김보다는 만듦에 가깝다. 하지만 번역자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대우와는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H6s픽사베이
번역은 옮김보다는 만듦에 가깝다. 하지만 번역자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대우와는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H6s픽사베이

고현석 | 영어 번역가

번역 일을 처음 시작하고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작업에 할애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당시 매우 어렵게 얻은 일거리를 붙잡고 하루 12시간 넘게 번역에 매달렸다. 그렇게 몇년 동안 일하면서 나름 노하우도 생기고 번역료도 어느 정도 받게 됐지만, 이젠 허리 통증 등 몸이 안 좋아져 장시간 작업하기 힘들다. 초기의 절반쯤이나 일할까.

나는 주로 과학 단행본을 번역한다. 처음에는 긴 호흡의 글과 싸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신문사와 뉴스통신사에서 일하면서 짧은 글을 쓰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은 원저자의 문장을 매우 충실하게 우리말로 옮겨야 하는, 매우 지루한 작업이다. 가끔 원저자가 잘못된 내용을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원문을 뜯어고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약간 고민하다 결국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뒤 편집자와 나중에 상의하기로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늘 마감에 쫓기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외국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이 애초 가능한 일인지 하는 생각을 쓸데없이 많이 하게 된다. 어떤 날은 어떻게 번역해도 문장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 내게 번뇌를 일으키게 만드는 전형적인 문장이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영어 문장을 직역에 가까운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옮길 것인지, 조금 풀어서 “증거가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길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풀어서 번역하면 이해는 쉽지만 원저자의 글맛을 살리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런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다. 몇년 번역 일을 하면서 요령이 생겼거나, 무감각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문제들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생계형 번역가인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수입, 즉 번역료와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수십권 책을 번역하면서 계약서에 명시된 날짜에 번역료를 받은 경우는 몇번 안 된다. 지급일에 입금을 기다리다 출판사에 연락하면 담당 편집자는 매우 미안해하면서 다음 달 또는 그다음 달에 반드시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출판사와의 관계에서 을인 처지이기에 다음에 주겠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담당자에게 밉보이면 차후에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번역 단가 문제도 크다. 내 경우 초보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된 몇년 전에 받던 번역료와 지금 받는 번역료가 거의 같다. 심지어 1990년대와 비교해도 거의 같은 수준이다. 번역료 책정에는 물가상승 요인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번역 단가를 올리기 위한 협상은 위험하다. 그러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경험을 한두번 하며 웬만해선 출판사가 제시하는 단가에 맞추는 것이 결국 이득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가끔 원서를 검토해달라는 의뢰를 받곤 한다. 출판사에서 책이 얼마나 시장성이 있을지 판단하는 데 참고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번역자에게는 계륵 같은 일이다. 책 전체를 읽고 출판사가 원하는 양식대로 정리해야 하므로 원서 검토에 걸리는 시간은 동일 매수의 번역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보다 길다. 그럼에도 며칠 시간이 필요한 검토 의뢰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검토비 명목으로 주는 10만~20만원보다도 출판이 결정될 경우 자신이 번역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몇년 동안 번역 일을 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은 언제 이 일을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프리랜서가 그렇듯이 번역가도 일거리가 더는 들어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산다. 그럴 때마다 이번 책만 마감하고 차분하게 미래를 생각해 보자고 결심하지만,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책을 번역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곤 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문장도 어떤 번역가의 손을 거쳤으리라. 그 번역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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