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난장이의 공, 2018, 400×44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크리틱] 강혜승 ㅣ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TV문학관’이라는 단막극 시리즈가 있었다. 근현대 문학작품을 영상으로 옮겼는데,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2007년에 방영됐다. 도시개발 광풍이 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빈민들의 소외를 그린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난쟁이’로 불린 왜소한 아버지와 가족이 비탈길 꼭대기 판자촌에 둥지를 틀면서도 명패를 달고 행복했던 날, 막내딸은 고사리손으로 시멘트 마당 한쪽에 붉은 꽃을 심었더랬다. 소설에선 철거반의 쇠망치가 그들의 보금자리를 허문 날, 훌쩍 자란 딸은 내내 키우던 팬지꽃을 공장 폐수 속에 던져버렸다.
꽃을 심던 장면을 다시 찾아본 건 작품 한점 때문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진행하는 소장품 기획전에서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4m 높이 회화로, 제목이 ‘난장이의 공’이다. 작품 속 서울 한복판의 모습이 사진처럼 세밀한데, 먹먹한 분위기가 매끈한 사진과는 다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 정재호가 2018년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 올라 내려다본 예지동 일대를 한지 위에 그렸다. 풍경은 낯익으면서도 낯선데, 그 공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한때 시계 골목으로 유명했지만, 세운4구역으로 지정돼 일찌감치 철거됐다. 골목 상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작가는 주로 도심의 철거예정지를 화폭에 담는다. 한지 특유의 물성 때문인지 부재의 상실감 때문인지 작품은 애조를 띤다. 오래된 기억 같은 기록이다. 작가가 올랐던 세운상가도 머지않아 사라질 예정이다. 서울시는 최근 대개조 계획을 발표했다. 종로3가 일대 판자촌을 재개발해 만든 세운상가는 1970년대 불도저식 경제개발을 상징했지만 어느새 낙후돼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서울시 처방은 달랐지만, 재생이든 재개발이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전면 철거식 재개발을 논제로 삼자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을 눈여겨본 이들은 따로 있다. 전시를 보고 감상평을 써보는 과제를 최근 대학 수업에서 다뤘다. 학생 수가 100명이 넘으니 모집단이 적지 않은 편인데, 비평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작품이 바로 ‘난장이의 공’이다. 그리고 함께 비교된 작품이 이용백의 비디오 작업 ‘기화되는 것들’(1999)이다. 이 작품은 서류가방을 든 정장 차림의 남성이 산소호흡기를 낀 채 깊은 물 속을 걷다 허우적거림 끝에 사라지는 7분 길이 영상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작가가 마주했던 현실은 물길 마냥 숨 막히는 외환위기 상황이었다고 한다.
근작이 40점 가까이 내걸린 대형 전시였다. 첨단기술과 만난 감각적인 작품에 학생들의 시선이 쏠릴 줄 알았다. ‘난쏘공’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97년 외환위기도 역사책에서나 접했을 2000년대 초반생들이 이 작품들을 보며 상실과 불안을 말할 줄은 몰랐다. 개발된 아파트촌 한가운데 산다는 학생은 자신이 사는 터전이 누군가의 터전을 밀어버렸을 과거에 마음 썼다. 정말 주저앉을지도 모를 위기감을 토로한 학생도 있었다. 청춘은 원래 아프다지만, 청춘의 사라진 희망을 대면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