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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6411의 목소리] 엄마를 위한 회사는 없다

등록 2023-11-19 18:45수정 2023-11-20 02:40

결혼과 육아로 정규직을 포기해야 했던 필자가 프리랜서 개발자로서 업무를 보는 모습. 필자 제공
결혼과 육아로 정규직을 포기해야 했던 필자가 프리랜서 개발자로서 업무를 보는 모습. 필자 제공

박정민 | IT개발자

나는 아이티(IT) 개발자다. 이 이름이 아직도 나는 너무 좋다.

2005년 7월, 대학을 졸업하기 전 만 21살 때 취업에 성공했다.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감히 너 따위 어린애가 뭘 안다고’ 하는 시선 때문이다. 그래도 실제로 어렸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어려움쯤은 견딜 수 있었다. 일이 재밌었다.

그 시절 아이티 개발자는 야근은 필수요, 주말 출근은 필수 권장 덕목이었다. 그래서 한달에 하루 이틀 빼고 내내, 또는 밤새워 일하기도 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아이티 개발자로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뿌듯함과 선배들의 잘한다는 칭찬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야근도, 선배들과 술 마시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어렸고, 젊었고, 체력도 좋았고, 의지도 강했다. 힘든 것과 별개로 직업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던 게 결혼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칭찬해주던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자 “그럼 언제까지 일해? 곧 관두겠네?”라고 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내가 곧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임신까지 하게 되자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언제까지 일해?”라고 물어왔다.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일했다.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내 자리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만삭 때까지 일했다. 출산 2주 전에야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육아휴직을 쓰다가 출산 9개월 만에 복직 권유를 받았고, 아직 어린아이가 걱정됐지만 회사 권유에 두말 안 하고 복직했다. 복귀에는 다소 적응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여전히 개발자로서 인정받고 있는 듯했고,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러던 중 차세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이티 업계에서 차세대 프로젝트는 힘들기로 손에 꼽히는 업무다. 야근은 기본, 주말 출근도 불사해야 한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한 파트를 맡았는데, 주요 업무가 아닌 그나마 혼자 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육아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약간의 착잡함을 느꼈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뒤 어느 날 사장님이 불러서 말했다. ‘다른 회사에 자리가 하나 났는데, 거기는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에 더 수월할 거다. (워킹맘에 대한) 지원제도도 잘돼 있다니 면접을 한번 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평소 직원 사정을 잘 살피는 사장님은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내가 걱정돼 더 나은 일자리를 추천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제안이 그저 불안하게만 다가왔다. 돌려 말하는 해고인 듯해서였다.

이러다 진짜 잘리는 건 아닌가, 싶어 사장님이 권고한 회사 말고도 몇몇 다른 회사에도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그곳들에서 결혼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을 들었다. “야근할 수 있어요?”, “우린 애 엄마는 안 써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데도 그럴 거예요.”

결국 나는 어디로도 이직하지 못했고 기존에 다니던 회사 사장님의 배려 아래 이직 권고는 없던 일로 마무리됐다. 이후 몇번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나는 프리랜서라는 신분으로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아이를 키우며 일해야 하는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더는 다른 곳으로 떠밀리듯 이직을 권유받지 않아도 되었고, 사실상 관두라는 말과 다름없는 먼 거리 파견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정규직에게 주어지는 4대 보험 혜택은 받을 수 없게 됐지만, 이제 회사 소속 개발자가 아니라 업무 책임을 혼자 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저 어쩌다 들려오는 ‘이 사람 개발 잘해요’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내가 한때 개발자였음을 상기시켜준다. 생각해 보면, 결혼한 여자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나는 결혼과 임신을 하면서 좋아하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었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정규직을 포기해야 했다. 누군가는 승진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경력을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좋아하던 개발자의 마음을 포기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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