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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헌책의 가격

등록 2023-11-22 18:44수정 2023-11-23 02:39

헌책들. 위키미디어
헌책들. 위키미디어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방송인 유병재씨가 법정스님의 ‘무소유’(범우사, 1976) 초판본(정확하게는 초판 초쇄본)을 구입했다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 계정에 공개했다. 정가는 280원. 구입가격은 100만원. ‘드디어 소유합니다’라는 그의 진술과 ‘무소유'라는 책 제목, 그리고 심상치 않은 가격은 서로 어긋나면서 하나의 재담을 구성하는데, 많은 이들이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왜 책을 100만원이나 주고 사느냐고 화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저런 희귀본이 아니더라도 중고 책의 가격은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나는 평생 새 책보다 헌책을 더 많이 샀다고 생각하는데, 지켜 온 원칙이 하나 있다. 헌책 가격이 현행 정가의 55% 이상일 때는 포기한다는 것이다. 헌책은 목적 구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우연한 발견과 즉흥적 결정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에 정가의 3분의 2 가까이 지불할 의미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원칙을 고수하면 갈수록 살 수 있는 책이 없다는 것이다. 배송비를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현행 정가보다 1천~2천원 쌀 뿐인 헌책이 적지 않다. 그것을 또 기꺼이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것은 알뜰함인가? 그렇다면, 보답을 받는 알뜰함일까?

헌책 가격 상승의 원인이 수수께끼는 아니다. 첫째 원인은 이미 앞에 나왔다. 2000년대부터 진행된 책 거래의 온라인화로 헌책은, 새 책도 그렇지만, 목적 구매의 대상으로 변했다. 즉 귀갓길에 뭐 없나 하고 습관적으로 들르는 사람이 아닌, 그 책을 사려고 검색한 사람만 상대하는 장사가 된 것이다. 이런 장사가 어려움에 빠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다.(도서 산업 전체가 충동 매출의 증발을 회복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중이다.) 아무튼 손님의 목적이 뚜렷할수록 가격을 낮출 이유는 없게 된다.

둘째 원인은 책 거래 온라인화의 당연한 수순으로 개인들이 판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헌책 거래에서 개인의 역할은 책을 그냥 버리거나 무게를 달아 업자에게 넘기는 일에 국한되었다. 지금은 개인이 온라인으로 헌책을 파는 데 어려움이 없으며 업자와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은 취미 물품 시장과 비슷하다. 활발한 ‘장터거래’(개인간 온라인거래)는 업자의 매입가를 높이고, 이는 업자의 판매가 상승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장터가를 끌어올린다. 업자와 개인 판매자가 서로 가격 상승을 견인하는 중고시장에 책도 입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절판 도서의 급증을 언급해야 한다. 5만원, 10만원짜리 헌책은 이미 드물지 않다. 잠깐 방심했다가 구하려고 하면 절판되어 그런 가격이 붙어 있다. 고서도 아니고 고작 몇년 전 출간된 책들이 그러니 놀라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했던 건 아닐까? 실은 5만원이 그 책의 진정한 가격이고, 새 책에 1만, 2만원이라고 붙은 정가야말로 절판 전 임시가격에 불과한 것 아닐까? 새 책을 시장에 붙들어 두는 것이 독서 대중의 힘인데, 그게 여의치 않다면 은폐돼 있던 진정한 가격의 시간이 올 수밖에 없다.

절판되기 한참 전부터 책 정가의 두세배 가격을 올려놓고 기다리는 중고 판매자들이 꽤 있다. 이들은 시간과 싸우고 있지 않다. 시간이 이들의 편이다. 모든 책은 절판되기 마련이며 권당 발행부수는 계속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익을 실현하는 시간은 갈수록 빨라질 것이다. 요컨대 헌책 가격의 상승은 도서시장의 쇠퇴와 주변화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이 추세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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